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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사람들의 시대는 갔는가”···내 기억 속의 노회찬

허남설 기자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대는 갔는가”···내 기억 속의 노회찬

“노회찬…. 그가 떠났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시기에, 떠올려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떠났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대는 갔는가? 내가 봤던 그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제 한 명도 이 땅에 남아있지 않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 블로그 글 ‘내 친구, 노회찬을 위하여...’에서 발췌)

정의당 노회찬 원내대표가 23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향년 62세. 재야 노동운동과 진보정당 창당 운동에 몸바치고, 진보진영 대표정치인으로서 3선 국회의원을 지내기까지 40여년. 그 족적을 곁에서, 혹은 먼발치에서나마 지켜봤던 인사들의 애도가 끊이지 않습니다. ‘진보정치의 입’ ‘촌철살인의 달인’ ‘언어의 연금술사’…. 유려한 언변으로 각인된 고인은 실제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각계각층에서 전하는 추모의 글과 고인에 대한 기억을 모았습니다.

■정의당 심상정 의원(24일 페이스북)

나의 영원한 동지, 노회찬.

그가 홀로 길을 떠났습니다.

억장이 무너져내린 하루가

그렇게 갔습니다.

■경제학자 우석훈 박사(블로그 ‘우석훈 임시연습장’)

내가 30대에 만났던, 한국 진보정치를 대표하는 몇 사람들은, 정말로 너무너무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람을 적게 만나지는 않았다. 극우부터 극좌까지, 정치라면 당연히 아나키즘이어야 한다는 극단에 있는 사람들까지, 다양하게 만났다. 2004년 이전, 민주노동당이 아직 원외 정당이던 시절, 그 앞에 서 있는 몇몇 사람들은 너무너무 찬란하고, 소박하지만 후광이 서린, 그런 아름다운 사람들이었다. 그 사람들과 몇 년을 같이 보냈다.

노회찬… 그가 떠났다. 생각해본 적도 없는 시기에, 떠올려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떠났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시대는 갔는가? 내가 봤던 그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제 한 명도 이 땅에 남아있지 않다. 대충 살고, 적당히 하고, 술만 열심히 마시던 나만 혼자 살아남았다. 나는 그들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그들처럼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기억하면서, 가끔 혼자 슬퍼하는 그런 바보 같은 일만 하게 될 것 같다.

너무너무 아름답고, 너무너무 찬란했던 기억만을 남겨놓고 노회찬, 그가 갔다.

남은 사람들은 이제 어쩔거냐… 지나치게 아름다운 사람들, 가끔은 무심하고, 때때로 무책임하다.

노회찬, 그가 도착할 천국에는 잔디밭과 삼겹살 불판 그리고 그와 같이했던 동지들이 있을 것 같다. 아름답게 들풀이 피고, 친구들의 수다소리 가득한 그곳, 그곳에서 영원히 지낼 수 있기를 바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 나오는 대사다.

“좋은 놈들은 이미 다 죽었어…”

진짜 그렇게 되었다. 그들이 지금쯤 노회찬의 천국에서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전문: 내 친구, 노회찬을 위하여...)

■사회학자 이진경 수유너머 연구원(페이스북 글 중)

노회찬 의원과는 개인적인 연이 있습니다.

구치소에서도 같이 있었고 징역 생활도 청주에서 같이 했지요.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강연할 때 항상 드는 예인데

아주 보기 드문 사람이었습니다.

감옥이란 자유를 제한하는 구속의 공간이죠.

그래서 누구나 닫힌 방의 숨막히는 공간에서 나오려 애쓰는데

그래도 그 당시 구치소는 정치범이 너무 많아(300명 이상)

징역 생활이 좀 ‘트여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노회찬 씨는 인사라도 하려 찾아가보면

문을 잠가놓고 있는 겁니다.

하여 문을 또달라고 할까요 물어보면

그러지 말라고, 자기가 일부러 부탁해서 잠근 거라는 겁니다.

이유를 물으니

구속되기 전엔 보고 싶은 책이 많아도 시간이 없어 못 보았길래

구속되면서는, 이젠 책 좀 실컷 봐야지 했답니다.

그러나 징역이 트여있는 덕에

찾아오는 이들이 너무 많아 책을 제대로 볼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일부러 잠가 놓고, 닫힌 문 앞에서 얼른 돌아가게 하려는 것이라는 겁니다.

흔히 자유와 구속을 대립시키지만

이를 보고선, 아, 자유란 때로 더 강한 구속을 자처하면서도 가능한 것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책을 보는 자유를 위해 방문을 잠그는 구속을 자처한 것이니까요.

마치 자유인이 되기 위해 문을 잠그는 무문관 수행자들 처럼.

자유란 그런 점에서 능력이라고,

능력만큼 자유로운 것이라고 하는 얘기를 무엇보다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사례였습니다.

■이은의 변호사·<예민해도 괜찮아> 저자(페이스북)

노회찬 의원을 처음으로 만난 건 TV 토론프로그램에서였다. 그는 패널로 출연했고 나는 시민토론단이었다. 회사와 싸울 때였는데, 어리고 별 특징없는 시민이 막간을 이용해 토로하는 얘기를 묵묵히 들어주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한 1년쯤 지나 싸움이 거의 마무리될 무렵 비슷하게 다시 잠시 마주했다. 고맙고 신기하게도 그는 나를 내 이야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회사랑 한참 싸우던 때라 알고도 뭔가 직접 손내밀어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 그런 ‘기억’과 ‘진심어린 안타까움’이 얼마나 귀하고 고마운건지 잘 몰랐다. 다시 세월이 흘러 변호사가 됐다. 그런데 어떤 포털에서 특별히 이유없이 내가 잘 조회되지도 않고 인물등록도 받아주지 않는 상황이 생겼다. 반년넘게 씨름하다 인권위에 진정했는데 보도가 됐다. 그 때 노회찬 의원실에서 관심을 갖고 연락이 왔다. 그런 관심 덕분인지 시간이 조금 흐른 후 사건은 상식적으로 잘 마무리됐다.

개인적으로 교류하며 지낸 관계은 아니었지만 딱 그 사람을 닮은 어떤 기억이 남아있다. 요란하지 않은 묵묵한 진심. 꽤 많은 사람들에게 그는, 비슷한 사람이었구나 싶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 사람의 부재 속에 비로소 민낯을 드러낸다.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거나 진즉 사라진 그런 민낯이 있는, 드문 사람이었다. 그의 마지막 선택이 아직도 믿기지 않고 먹먹하지만. 부디 이젠 편안하시길.

2005년 9월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05년 9월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경향신문과 인터뷰하면서 국회의사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 모두발언 중)

노회찬 의원의 사망 소식에 정말 가슴이 아프고 비통한 그런 심정입니다. 노회찬 의원은 당을 함께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대에 정치를 하면서 우리 한국 사회를 보다 더 진보적인 그런 사회로 만들기 위해서 함께 노력을 해왔습니다. 우리 한국의 진보정치를 이끌면서 우리 정치의 폭을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해왔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으로 아주 삭막한 우리 정치판에서 또 말의 품격을 높이는 그런 면에서도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노회찬 의원의 사망에 대해서도 깊이 애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족들과 정의당에도 위로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민주당 이종걸 의원(페이스북)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긴 세월을 같이하면서 동반자 같았던 친구의 비보를 접했습니다.

까까머리 고등학생 시절에 서울 화동의 경기고등학교 교정에서 그를 처음 만났습니다. 10대 소년들이 청춘을 즐기기에는 ‘10월 유신’으로 그 폭압성을 더해가던 박정희 철권 통치가 너무나 분노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창작과 비평>도 읽고, 함석헌, 백기완 선생의 강연도 다녔습니다. 퇴학 조치를 불사하고 유인물도 돌리고 데모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형성되었던 가치관과 사회관이 우리의 평생을 지배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무살이 되고 서른 살이 되고 마흔 살이 되고 어느덧 육십 살이 되는 동안 나와 그는 민주화운동을 했던 대학생으로, ‘양심수’와 변호사로, 도망자와 숨겨주는 사람으로, 운동권 대표와 정치인으로, 둘 모두 국회의원으로 관계는 달라졌지만, 한결 같이 만났습니다. 생각은 조금씩 달라졌지만, 서로를 신뢰하고 다른 생각을 존중하는 좋은 벗이었습니다.

그리운 친구여!

네 모습을 떠올리니, 더 이상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구나.

너와 나눴던 많은 이야기는 나 혼자라도 간직하련다.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그 어렸던 시절 함께 꾸었던 꿈은 내 몫으로 남겨졌구려. 부디 평안하기를.

■자유한국당 이재오 상임고문(페이스북)

노회찬 의원님, 정말입니까?

죽는다는 것은 한번 해보는 것이 아닌데 왜 그랬습니까? 돈 때문입니까? 그런데 왜 죽어버립니까?

노 의원님, 당신께서 늘푸른당 창당대회 축사하시던 모습이 이승에서 당신을 대한 마지막이었습니다. 그때 정의당의 가치와 늘푸른당의 가치를 하나하나 비교하시면서 정의로운 국가, 공평한 사회를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라고 하신 말씀이 늘 생각이 나곤 했습니다. 그런데ㅡ 이제 정말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몸담은 정당이야 다르지만 추구하는 궁극적인 가치야 다를 수가 있겠습니까. 당신이 택한 죽음 앞에 할 말이 없습니다.

죽고사는 문제가 이렇게 허망할 줄이야, 새삼 가슴을 칩니다.

부디 저승에서나 편하게 보내십시요. 명복을 빕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던 중 당신의 죽음을 듣고 우선 몇자 올립니다.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페이스북)

3박 5일 간의 짧은 방미기간동안 18개의 공식일정을 바쁘게 소화하면서 그 어떤 내색도 없었다.

미 의회지도자들을 만나 굳건한 한미동맹의 기틀이 없다면 비핵화도 평화도 이룰 수 없다는 나의 주장에 사적인 자리에서나마 공감을 표하면서, 그래도 대화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던 그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선명하다.

나 때문에 순방단이 조기 귀국하는 게 못내 미안해 귀국 전날 대접한 술자리에서 용접공 면허를 취득한 얘기며, 노동운동에 젊음을 바쳤던 시절을 함께 회고하면서 즐거워하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니 이렇게 비통할 수가......

노동운동의 처절한 현장에서 늘 노동자와 소외된 약자의 고충을 대변하던 고인의 삶의 추모하며, 삼가 명복을 빈다.

■시사평론가 김용민 (페이스북)

제가 2012년 국회의원 총선 당시 막말 파문으로 다음 생에 먹을 욕까지 가불해서 먹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부산에 가서 팟캐스트 녹음을 했는데 돌아오는 길. 한 차로 왔습니다. 그 분과. 그 분은 서울 노원병. 저는 노원갑이니까.

참담한 마음이고 멋쩍어서 오는 길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먼저 제가 내릴 때쯤 그 분은 아무 말없이 따뜻한 손으로 제 손을 감싸줬습니다.

그 분은 바로 고 노회찬 의원님입니다. 그런데 저는 노 의원님 손을 못 잡았네요.

2012년 6월 노회찬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이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전국노점상대회에 참석해 바닥에 앉아 연단을 바라보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2012년 6월 노회찬 당시 통합진보당 의원이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전국노점상대회에 참석해 바닥에 앉아 연단을 바라보고 있다. 김영민 기자 viola@kyunghyang.com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더불어민주당 의원(페이스북)

<빈자리>

오늘 아침, 비보를 접하고 머리가 한 순간에 하얘졌습니다. 그러다 그 분과의 기억이 차츰 주마등처럼 스쳤습니다. 장관의 신분이라 말을 아낄 수밖에 없습니다만, 한국정치에 너무나 큰 손실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마침 오후에는 공무원 노조와 우리 행안부가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지금 노조는 전공노, 공노총, 통합 노조 등 모두 3개입니다. 전공노가 지난 3월에 합법노조가 된 후, 지난 6월 제가 세 노조를 다 만나 뵙고 공식 테이블을 갖기로 약속 드렸습니다.

오늘 자리는 그 약속에 따라 가진 첫 ‘정책 협의체’입니다. 거의 10년 만에 재개된 자리입니다. 물론 공무원노조법 상 공식적인 정부교섭대표는 ‘인사혁신처’입니다. 하지만 임금과 급여제도는 인사혁신처이지만, 공무원 특히 지방공무원들이 일하는 현장에서 닥치는 이러저런 문제에 대해 저희 부의 소관 업무가 많은 만큼 노조에서 행안부와의 협의 테이블을 원했습니다.

앞으로 두 달에 한 번씩 만나, 그 분들의 목소리를 듣고 개선하거나 바꿀 것은 눈치 보지 않고 바꿔나가겠습니다. 그렇다 해도 어찌 그 분의 빈자리를 채우겠습니까?

빈소로 달려가는 길입니다.

저에게 노회찬 의원은 ‘유연한 정치인’이었습니다. 진보가 얼마나 온유하고 품이 넓은지 보여주셨던 분입니다. 노동자가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나라, 진보가 가치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을 바꿀 구체적 힘이 되는 정치, 무던히 애를 쓰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우리 세대의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걸 남은 우리한테만 맡기고 저렇게 가버리시는지... 정말 비통합니다.

■주승용 국회부의장·바른미래당 의원(페이스북)

<노회찬 의원을 보내며,,,,>

노회찬 의원과 저는 살아온 길과 정당은 달랐지만,

그는 제가 아는 정치인 중 가장 훌륭한 달변가였습니다.

정치현안에 대해 그가 말했던 ‘유쾌한 비유’는 항상 무릎을 치게 만들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그렇듯 세상에 흠결이 없는 정치인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는 강해 보였지만, 자신의 양심은 속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더 안타까울 뿐입니다.

수억, 수십억의 뇌물을 받고도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큰 소리 치며 <정치탄압>이라는 말을 쓰는 뻔뻔한 정치인들이 많은데.

그냥 좀 더 버텨내지,,,라는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좋은 대학나와서 용접공으로 일했던 노동운동가.

대한민국 진보정치의 한페이지는 노회찬의 삶으로 기록 될 것입니다.

진심으로 그의 마지막을 애도합니다.

편히 영면하시기를.

■박유하 세종대학교 교수(페이스북)

노회찬 의원을 한일관련회의에서 두번 만나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따뜻하고 심지가 올곧은 사람 같아 호감을 가졌었다.

노유진 카페에서 유시민씨와 진중권씨가(게스트로 나왔던 심용환씨를 앞세워) 나를 비난할 때, 그는 굳이 나서서 코멘트하지 않았고, 나는 그 태도를 한번 만났던 사람에 대한 예의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경박한 시대 속에서의 진중한 태도에 다시 호감을 느꼈었다.

요동치는 사회에선 ‘정치적’강자만이 살아 남는다. 안타깝고 슬프다.

노회찬 의원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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