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87년 창간된 <한국사 시민강좌> 창간호.
"역사학자들이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세상에서는 한국사학의 문제를 둘러싸고 무척 시끄러운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민족을 위한다는 구실 밑에, 어떤 사람은 현실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한국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사학은 마치 제단 위에 놓인 희생물과 같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은 연구실과 시민 사이의 소통 부족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 소통의 역할을 하기 위해 '한국사 시민강좌'를 펴내게 되었다. 이기백은 역사학이 어떤 목적에 봉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단호하게 밝힌다.
"역사적 현상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객관적인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편집자의 신념이다. 그리고 객관성이 결여된 주장은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며, 따라서 절대로 이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요컨대 한국사학은 진리를 어기면서 어떤 특정 세력의 이익을 위하여 봉사하는 시녀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곧 한국사학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죽어버린 한국사학이 민족이나 인류를 위하여 아무런 쓸모도 없는 폐물이 되고 말 것임은 스스로 명백한 일이다."
이렇게 단호한 입장을 갖게 된 데는 배경이 있다. 1975년 결성된 유사역사가 단체였던 국사찾기협의회가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고 소송까지 제기했다. 역사학계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반박했고 재판에서도 진 유사역사가들은 정치권을 이용해서 1981년에 국회 공청회를 열기에 이르렀다. 당시의 일에 대해서 이기백은 이렇게 말한다.
"학문적 진리를 존중하는 점에서 볼 때 교과서 파동은 심각한 문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때 중요하게 문제가 된 건 단군 이야기인데, 단군에 관한 전승을 신화라고 하지 말라고 하며 학자들을 공격했습니다. 왜 학생들에게 단군신화라고 가르치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조선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고조선 건국주로서의 단군은 틀림없는 역사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을 신화가 아니고 역사적 사실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르칠 수는 없습니다. (중략) 여러 학회들이 모여서 성명을 낸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마 김원룡 선생이 주도하여 학회 대표들을 모았을 것입니다. 저는 역사학회 회원이지만, 학회 대표가 자기는 강의가 있으니까 제가 나가라고 그래요. 제가 사양할 수가 없어서 기자회견에 참석하였고 또 몇 차례 글도 썼습니다. 어떤 학회에서는, 학설 문제인 걸 가지고 왜 학회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느냐며 참석하지 않았어요. 그 뒤 국회 문공위에서 청문회가 있었지요. 저도 불려나갔습니다."
이 자리에서 역사학자들은 유사역사가들의 발언을 매섭게 비판했다. 하지만 국회의원들은 오히려 역사학자들의 태도를 문제 삼으면서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주었다.
"사실은 이런 일들이 계기가 돼서 '한국사 시민강좌'가 시작되었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저에게도 자꾸 질문을 했습니다. 아주 잘 아는 사람들도 고조선의 영토가 어디까지였다는데 어떻게 됐느냐고 질문합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식민주의 사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싶어서 창간호에서는 그것부터 알려주려고 했습니다."
1986년 8월 15일에 조선일보는 "국사교과서 새로 써야 한다"는 기사를 1면 톱으로 내보냈다. 이후 29일까지 고대사가 축소 왜곡되었다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쳤다. 유사역사가들의 주장을 대거 집어넣은 공세는 1987년까지 계속되었고 학계의 힘만으로 유사역사학에 대응한다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시민의 역사의식을 높이기 위하여 '한국사 시민강좌'가 창간되었다.
제1호의 특집이 '식민주의 사관 비판'이다. 이 특집은 '반도적 성격론 비판(이기백)' '정체성이론 비판(강진철)' '당파성이론 비판(이태진)' '일본에 있어서의 한국사 연구의 전통(하타다 다카시)'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사에서 식민사관 비판은 이미 1961년 이기백의 '국사신론' 서문에서부터 나와 있었다. 학계는 1960년대에 식민사관 비판의 논문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렸는데, 유사역사가들은 이런 논문을 비판해본 적이 없다. 그들은 그저 이병도가 조선사편수회 근무를 했으니 친일파고, 역사학자는 다 그의 제자라 친일파라는 몰상식한 비난을 할 뿐이다. 심지어 이 비난조차 선별적이어서 이기백은 이병도의 제자라고 비난을 받지만 손보기는 이병도의 제자임에도 아무 비난을 받지 않는다. 그들에겐 이기백이 독립운동가 남강 이승훈의 집안이며 민족학교인 오산학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의 여지도 되지 않는다.
이기백은 식민사관 비판에서 도리야마 기치의 이론에 대해 비판한 뒤에 "이런 말을 학자로서 어떻게 감히 할 수가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고 말하고, 미시나 아키히데의 '지리적 결정론(반도적 성격론)'에 대해서도 "결코 학문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성질의 것이 못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기백의 비판은 이러하다.
지리적 결정론이란 지리의 형세가 역사를 결정한다는 것으로 한반도의 족속은 대륙과 해양의 세력에 의해 타율적으로 끌려다닌다는 주장이다. 이기백은 만주를 차지하느냐, 못 하느냐의 땅덩어리 역사가 아니라 인간의 역사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리적 결정론이라는 것 자체가 엉터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 반론도 엉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기백은 이렇게 말한다.
"넓은 국토를 개척하여 군사적 강대국이 되어야만 위대한 국가가 된다는 낡은 역사관 자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민족 내부로 돌려야 한다. 민족 내부에 쌓여 있는 모순을 개혁하여 우리의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킨 노력들이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위대한 민족, 위대한 국가를 이룩할 수 있는 정신적 기반을 닦을 수 있다."
그러나 유사역사가들은 이에 대한 반론으로 한민족은 원래 만주라는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그럴 듯해보이지만 일제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길이다. 지리적 결정론 자체는 맞는다고 인정하고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를 따르면 만주를 상실한 고려, 조선, 대한민국은 영영 대륙과 해양 세력에 휘둘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이 때문에 엉뚱한 무리수-고려의 국경선이 요하였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는 기반이 된다.
유사역사가들이 역사가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고 싶다면 1987년에 나온 역사학계의 식민주의 사관 비판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수준 낮은 누구의 제자라 스승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는 허수아비 치기가 아니라 학계의 식민사관 비판에 문제가 있다면 그 비판 자체에 대한 자신들의 견해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문영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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