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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광개토왕

[ 廣開土王 ]

원전서지 삼국사기 제18권 고구려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十八 高句麗本紀 第六)
시대명 고구려
재위기간 391년 ~ 413년
연도 391년 ~ 413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고국양왕 3년(서기 386)에 태자가 되었다. 9년에 임금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가을 7월, 임금의 병사가 남쪽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10개의 성을 점령하였다.
9월, 임금이 병사를 보내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여 남녀 5백 명을 사로잡고, 또한 본국에서 거란으로 도망갔던 백성 1만 명을 달래어 데리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금이 병사를 출동시켜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사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었다. 임금이 일곱 방면으로 병사를 나누어 공격하도록 한 지 20일 만에 병사들이 그 성을 점령하였다.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故國壤王三年 立爲太子 九年 王薨 太子卽位 秋七月 南伐百濟 拔十城 九月 北伐契丹 虜男女五百口 又招諭本國陷沒民口一萬而歸 冬十月 攻陷百濟關彌城 其城四面峭絶 海水環繞 王分軍七道 攻擊二十日 乃拔

2년(서기 393) 가을 8월, 백제가 남쪽 변경을 침략하자 임금이 장수에게 명령하여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평양에 아홉 개의 절을 창건하였다.
二年 秋八月 百濟侵南邊 命將拒之 創九寺於平壤

3년(서기 394) 가을 7월, 백제가 침략하였다. 임금은 정예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그들과 싸웠다. 살아남은 적들이 밤에 달아났다.
8월,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아 백제의 침범에 대비하였다.
三年 秋七月 百濟來侵 王率精騎五千 逆擊敗之 餘寇夜走 八月 築國南七城 以備百濟之寇

4년(서기 395) 가을 8월, 임금의 병사가 패수(浿水)에서 백제와 싸워 그들을 대패시키고, 8천여 명을 생포하거나 목을 베었다.
四年 秋八月 王與百濟 戰於浿水之上 大敗之 虜獲八千餘級

9년(서기 400) 봄 정월, 임금이 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연나라 왕 모용성(慕容盛)이 우리 임금의 예절이 오만하다는 이유로 직접 병사 3만을 거느리고 공격해왔다. 그들은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 모용희(慕容熙)를 선봉으로 삼아 신성(新城)과 남소(南蘇)의 두 성을 빼앗고, 7백여 리의 땅을 점령하여 그들의 백성 5천여 호를 이주시켜 놓고 돌아갔다.
九年 春正月 王遣使入燕朝貢 二月 燕王盛 以我王禮慢 自將兵三萬襲之 以驃騎大將軍慕容熙 爲前鋒 拔新城南蘇二城 拓地七百餘里 徙五千餘戶而還

11년(서기 402), 임금이 병사를 보내 연나라의 숙군성(宿軍城)을 공격하였다. 연나라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가 성을 버리고 도주하였다.
十一年 王遣兵攻宿軍 燕平州刺史慕容歸 棄城走

13년(서기 404) 겨울 11월, 군사를 출동시켜 연나라를 공격하였다.
十三年 冬十一月 出師侵燕

14년(서기 405) 봄 정월, 연나라 왕 모용희가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성이 함락될 즈음에 모용희가 장병들에게 명령하였다.
“성에 먼저 오르지 말라. 성이 평정되면 내가 황후와 함께 가마를 타고 들어가리라.”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성 안에서는 삼엄한 대비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끝내 성을 빼앗지 못하고 물러갔다.
十四年 春正月 燕王熙來攻遼東城 且陷 熙命將士 毋得先登 俟剗平其城 朕與皇后 乘轝而入 由是 城中得嚴備 卒不克而還

15년(서기 406) 가을 7월, 메뚜기떼가 출현하고 가뭄이 발생하였다.
겨울 12월, 연나라의 왕 모용희가 거란을 공격하기 위하여 형북(陘北)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거란의 병사가 많은 것을 겁내어 돌아가려 하다가, 수레의 무거운 군수품을 버리고 가벼운 몸차림을 한 병사들을 데리고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연나라는 3천여 리를 행군하여 왔기 때문에 병사와 말이 피로를 견디지 못하고 얼어 죽는 병사들이 길에 줄을 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저성(木底城)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十五年 秋七月 蝗 旱 冬十二月 燕王熙襲契丹 至陘北 畏契丹之衆 欲還 遂棄輜重 輕兵襲我 燕軍行三千餘里 士馬疲凍 死者屬路 攻我木底城 不克而還

16년(서기 407) 봄 2월, 궁궐을 늘려 짓고 수리하였다.
十六年 春二月 增修宮闕

17년(서기 408) 봄 3월, 북연(北燕)에 사신을 보내 같은 종족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북연의 왕 모용운(慕容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어 답례하였다. 모용운의 조부 고화(高和)는 고구려의 방계 혈족인데, 자칭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 하여, ‘고’를 성씨로 삼았다. 예전에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었을 때 모용운이 무예가 뛰어나서 태자를 모시도록 하였는데, 모용보가 모용운을 아들로 삼아 모용씨라는 성을 주었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報之 雲祖父高和 句麗之支屬 自云高陽氏之苗裔 故以高爲氏焉 慕容寶之爲太子 雲以武藝 侍東宮 寶子之 賜姓慕容氏

18년(서기 409) 여름 4월,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가을 7월, 동쪽 지방에 독산(禿山) 등 여섯 개의 성을 쌓고, 평양의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8월,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였다.
十八年 夏四月 立王子巨連 爲太子 秋七月 築國東禿山等六城 移平壤民戶 八月 王南巡

22년(서기 413) 겨울 10월, 임금이 돌아가셨다. 임금의 호를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 하였다.
二十二年 冬十月 王薨 號爲廣開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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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지린성 광개토대왕비 동면

중국 지린성 광개토대왕비 동면 414년 세워진 중국 지린성 광개토대왕비 동면이다. 1913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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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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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제공처 정보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권.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삼국사기》를 우리글로 번역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누구든 쉽게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쉬운 낱말과 어색하지 않은 현대적인 문장으로 풀이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독자들이 '옛 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까지 알게 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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