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편 한국사
  • 조선 시대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4. 사족지배체제하의 신분질서
  • 2) 양란중의 신분 혼효와 정리

2) 양란중의 신분 혼효와 정리

 16세기 말 17세기 초에 걸쳐 조선왕조는 왜란과 호란을 치르면서 사대부층의 통치능력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이는 그 이전부터 동요하고 있던 지배체제가 양란을 통해 더욱 이완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정부가 전쟁의 수행과정에서 이에 대응하기 위한 일련의 조처는 종래 신분제에 대한 명분론적 인식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것은 軍功論賞과 原從功臣錄勳, 納粟論賞 등과 같은 제도적 신분상승 조처를 통해 신분계층이 혼효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란을 통해 중인과 양인, 천인들이 합법적으로 그들의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이 비교적 넓어짐으로써 나타난 현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양란을 치르면서 인구의 지역적 이동과 노비의 도망 등도 신분이 혼효하게 된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의 조선사회는 병농일치제가 무너지고 軍籍收布法(중종 36년;1541)이 실시되면서도 그것에 대신할 傭兵制와 같은 새로운 군사제도가 성립되지 않았고, 또한 행정체제의 이완으로 正軍이 될 수 있는 양인 인구가 줄어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군의 확보를 위해서는 公私賤·庶孼 등도 군역에 충당되었고 또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군공논상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였으나 이로 인해 결국 하층민의 제도적 신분상승을 수반하게 되었다.

 임란중의 군공논상에0216)壬亂 중의 軍功論賞에 관하여는 주로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李章熙,<兩班·農民層의 變化>·<奴婢制의 崩壞>(≪한국사≫13, 국사편찬위원회, 1978).
平木實,<奴婢의 免賤從良形態>(≪朝鮮後期奴婢制硏究≫, 지식산업사, 1982).
관한 기록으로는 선조 25년(1592) 11월부터 보인다. 즉 이 때 적의 목을 베었거나 작은 공을 세운 자에게는 告身帖, 免賤·免役帖을 주었다.0217)≪宣祖實錄≫권 32, 선조 25년 11월 임오. 이로 볼 때 면천·면역첩의 대상은 주로 비양반층이었을 것이고, 따라서 비양반층도 군공을 통해 그들의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달의 기사에서 군공이 뛰어난 자에게는 參奉(종9품)에서 軍器寺正(정3품)에 이르기까지의 加設職을 주겠다는 것이다.0218)≪宣祖實錄≫권 32, 선조 25년 11월 경신. 여기에는 신분에 관한 언급이 없어 하층신분도 가설직의 대상이 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선조 27년 軍功廳의 보고에 의하면 “公·私賤도 적 1명을 베면 면천하고 2명을 베면 羽林衛에 소속되게 하고 3명을 베면 許通하고 4명을 베면 守門將을 제수하는 것이 이미 규례로 되어 있다. 이미 허통되고 관직을 받았으면 사족이나 다를 것이 없다. 공·사천뿐만 아니라 才人·白丁·匠人·山尺 등의 미천한 신분도 또한 높은 관직으로 뛰어오른 자가 있다”고 하였다.0219)≪宣祖實錄≫권 51, 선조 27년 5월 을유. 이는 군공이 현저한 자에게 논상하고 군사의 사기를 고무하는 데 목적이 있었지만, 군공으로 인해 공사천 등의 하층민이 禁軍의 하나인 우림위에 속하게 되거나 허통하여 과거에 나아갈 수 있거나 受職함으로써 양반 신분으로 상승하게 되는 경우도 있게 되었다. 또한 이들 하층민의 허통뿐만 아니라 서얼도 적 1명을 베면 허통이 가능하였다.0220)裵在弘,<朝鮮後期의 庶孼許通>(≪慶北史學≫10, 慶北史學會 1987), 113쪽. 이러한 정부의 제도적 조처가 이미 임란중에 규례가 될 정도였다면 각 신분계층간의 신분 혼효현상도 문제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군공사목의 규정대로 한다면 당시 최하층에 속하였던 공사천이 累功에 의하여 높은 관직까지 제수된다는 것은 당시 신분제를 엄격히 유지해 나가려던 분위기 속에서 용납될 수 없었던 일이었다. 그래서 위의 보고에 따라 천인 신분에 대한 군공논상은 적을 벤 수가 많아도 서반 종6품직의 主簿 이상을 주지 말고 그 이상은 다른 상으로 논상하기로 한 군공자 한품서용 규정이 정해졌다. 그러나 白雲瑞는 천인으로서 계속 군공을 쌓아 서반 정3품인 訓鍊正에까지 오른 예도 있다.0221)≪宣祖實錄≫권 52, 선조 27년 6월 경신. 또한 “요즈음 군공이 크게 넘쳐서 3품직을 얻지 않는 자가 없다”0222)≪宣祖實錄≫권 59, 선조 28년 1월 신사.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군공으로 얻은 직위의 한계도 엄격히 지켜지기 어려웠다.

 이러한 군공논상은 당사자뿐 아니라 전투로 인하여 전사한 자의 자식에 대한 논상도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군병의 사기를 격려하기 위한 조처였다. 선조 27년 9월에는 “전사자가 堂上 이상인 경우에는 그 아들 1명에게 6품 실직을 제수하고, 당상 이하관인 경우에는 동반 실직을 제수하고, 禁軍良人인 경우에는 아들 1명에게 금군을 제수하고, 公私賤의 경우에는 그 아들 1명을 면천”하기로0223)≪宣祖實錄≫권 55, 선조 27년 9월 기해. 하였다. 이는 군병의 사기를 격려하기 위한 조처였지만, 양인과 공사천 전망자의 자식까지도 금군을 제수하거나 면천과 같은 논상이 이루어짐으로써 결국 하층민의 신분상승의 길을 법제적으로 넓혀주는 계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戰亡者의 자손은 궁궐 밖의 숙위를 담당하였던 忠壯衛에도 입속할 수 있었다. 충장위는 광해군 초년에 창설되었는데, 당초에 군공·납속·전망자의 자식 등을 입속시켰으나 점차 주로 전망자손의 3대까지를 입속시켰다.0224)李俊九,<朝鮮後期의 諸衛屬과 그 地位變動>(≪朝鮮史硏究≫1, 伏賢朝鮮史硏究會, 1992), 211∼213쪽.
―――, 앞의 책, 180∼183쪽.
이리하여 하층민 전망자손의 3대까지도 금군의 하나인 충장위에 입속할 수 있음으로써 한정된 범위내에서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또한 임란중에 공사천으로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던 길은 公私賤武科와 斬級武科를 통해서도 가능하였다.0225)平木實, 앞의 책, 159∼164쪽. 공사천무과는 선조 26년 6월 왕의 하교에 의해서 제기되었다. 그것은 공사천에 設科하여 三醫司雜科의 예에 따라 武才를 시험하고 이에 합격한 자는 從良시켜 우림위에 입속시키자는 것이다.0226)≪宣祖實錄≫권 39, 선조 26년 6월 정유. 그러나 공사천무과를 실시하는 데는 문제점도 많고 또 반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 가장 큰 문제점은 역시 신분제도상의 문제였다. 즉 종래의 노비제도를 타파하여 공사천에게 출신의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後弊가 생길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사천무과는 선조 27년과 28년에 실시되고 다수의 奴子가 종양되었으나, 그 뒤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지된 듯하다.

 공사천무과와는 달리 참급무과도 실시되었다. 참급무과는 선조 26년 7월 왕의 하교에 의해서 실시된 것이다. 서얼과 공사천은 사족·양인과 一榜에 더불 수 없으니 別試를 한 번 치른 후에 서얼이면 2級으로, 공사천이면 3급으로 許科하기로 하였다.0227)≪宣祖實錄≫권 40, 선조 26년 7월 기사. 이 무과에 합격된 자의 수와 그 후 허과되어 제직된 자의 수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선조 26년에 실시된 무과의 예를 보면 전라도 3,000명, 경상도 2,000명, 충청도 1,000명을 먼저 試取하고, 初試入格者가 왜적 1명을 베면 허과하기로 했음을 알 수 있다.0228)≪宣祖實錄≫권 40, 선조 26년 7월 무진. 그러나 그 뒤 선조 32년 3월에 이 참급무과가 실시되고 훈련원에서 殿試가 실시되고 있는 것 외에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폐지된 듯하다. 이처럼 임란중에는 공사천무과와 참급무과를 통해서도 하층민의 신분상승이 합법적으로 가능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분이 혼효되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임란중에는 하층민이 原從功臣에 녹훈됨으로써 신분을 상승시키는 경우도 대단히 많았다. 선조 37년 6월에는 宣武功臣·扈聖功臣·淸難功臣이 녹훈되었다.0229)≪宣祖實錄≫권 175, 선조 37년 6월 갑진. 이 3공신은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선무공신과 왕을 扈從하는데 공을 세운 호성공신, 선조 29년 李夢鶴의 반란을 토평하는데 공을 세운 청난공신이 그것이다. 3공신의 녹훈에 이어 선조 38년 4월에는 각 원종공신이 녹훈되었는데, 이 때 녹훈된 인원은 선무원종공신이 9,060명, 호성원종공신이 2,475명, 청난원종공신이 995명이었다.0230)≪宣祖實錄≫권 186, 선조 38년 4월 경신. 정훈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녹훈된 원종공신에게는 1등, 2등, 3등으로 분류하여 공신녹권을 지급하고 각종 특권을 부여하였다. 이들 원종공신녹권은 임란중에 군공논상에 따른 신분의 향상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구체적인 자료라고 하겠다. 이들 녹권중에 宣武原從功臣錄券을 통해서 확인하기로 한다.

 선무원종공신은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군수품 보급에 기여한 인물로서 선무공신에 들지 못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9,060명을 녹훈한 것이다. 이들을 책록한 문서가 ‘선무원종공신녹권’이다. 여기에는 1등, 2등, 3등 원종공신의 명단이 그의 신분·직역과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종친으로부터 중앙관·지방관·許通·免役·保人·奴婢에 이르기까지 사회의 모든 신분계층이 망라되어 있다. 각 등급의 원종공신 명단 끝에는 이들에게 내리는 특권이 기재되어 있다. 그 내용은 본인에 대한 加資, 자손에 대한 蔭職敍用의 혜택, 부모에 대한 封爵, 후손에 대한 가자, 본인이나 후손의 죄에 대한 처벌의 면제, 공·사직의 면천 등을 규정한 것이다. 이 녹권에 기재된 9,060명 가운데 신분과 직역이 확실히 기재된 서얼·향리층 이하만을 보면, 면천이 740명으로 제일 많고, 다음으로 免役 407명, 私奴 395명, 水軍 389명, 保人 267명, 寺奴 148명, 許通 127명, 正兵 126명, 甲士 68명, 免鄕 58명, 官奴 57명, 書吏 55명의 순으로 나타나는데, 그 밖에도 다양한 하층민의 직역들이 확인된다. 이들은 대체로 3,230여 명으로서 전체의 37%에 해당한다.0231)趙啓纘,<壬辰倭亂期의 身分向上에 관한 小考>(≪東亞論叢≫12, 東亞大, 1976), 16쪽의 宣武原從功臣錄券에 책록된 자 가운데 향리·서얼층 이하만을 취급한 통계표 참조. 이들은 하층민으로서 임란중에 이들의 활동이 매우 컸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들 하층민은 군공에 대한 보답으로 각종의 특권을 부여받음으로써 제도적 신분상승을 보장받게 된 것이다. 선무원종공신녹권에서 확인된 서얼·향리층 이하의 수치는 같은 시기의 호성원종공신녹권과 청난원종공신녹권에서도 비슷한 수치가 예상된다. 따라서 이같은 제도적 신분상승도 신분 혼효에 미친 영향이 대단히 컸을 것으로 이해된다.

 뿐만 아니라 원종공신은 忠翊衛와 忠贊衛에 입속하여 국가로부터 특별한 처우를 받았다. 충익위와 충찬위는 국가가 원종공신에 대한 報功의 의미로 설립한 숙위병종이었다. 충찬위는 세조 2년(1456) 12월에 충의위의 예에 따라 원종공신에 대한 보공의 의미로 설립하였는데 조선 후기에도 존속하였다. 충익위는 광해군 8년(1616) 4월에 忠翊府가 復設되면서 창립되었는데, 창립 당초 입속자는 원종공신에 참록한 자 가운데 公私賤·新良人·諸色軍士·軍功·納粟·影職人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공사천과 免賤從良한 신양인 및 제색군사까지도 숙위입번하는 금군의 類가 될 수 있었다. 충익위와 충찬위는 원종공신을 대상으로 충원하였는데, 충익위는 그 嫡子가, 충찬위는 그 庶子(衆子를 의미)가 입속하였으며 각각 3대로 한정하였다.0232)李俊九, 앞의 글(1992), 202∼227·225쪽.
―――, 앞의 책, 172∼177·193쪽.
이리하여 원종공신의 有功·有蔭의 혜택이 그 자손의 3대까지에도 미침으로써 한정된 범위내에서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이같이 임란중의 군공을 통해 하층민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던 길은 임란이 종식됨에 따라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내란 또는 외침으로 국가가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論賞事目이 마련되었고, 군공을 세워 응분의 혜택을 받으려는 하층민의 욕구는 더욱 강렬하였다. 李适의 난 때나, 정묘호란 때도 군공으로 受職하는 자가 속출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임란 이후 가장 많은 군공 수직자가 나타났다. 이럴 때마다 정부는 군공에 대한 대가를 銀子로 포상하여 하층민의 신분상승을 억제할 생각이었으나 그들은 면천이 되어 하급 군직이나마 받는 것을 원하였으며, 사태가 다급할 때마다 그에 대한 처리를 위해 불가피하게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0233)李章熙, 앞의 글, 452쪽. 병자호란 때의 논공사목을 보면 “적의 목 하나를 벤 자는 공사천은 면천하고 양인으로 급제하여 직을 가진 자는 승진시키며, 2명을 벤 자는 加資 논상”0234)≪承政院日記≫54책, 인조 14년 12월 21일. 하기로 했다. 이러한 거듭된 전쟁으로 신분제는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하층민이 상층민으로 신분을 상승시키는 길도 그 만큼 넓어져 갔다.

 이상의 군공논상을 통해 볼 때 공사천과 양인·서얼 등도 군공의 정도에 따라 제도적으로 면천종양되거나 허통 또는 무과를 통하여 西班軍職에 나아갈 수도 있었으며, 전망자의 한 아들까지도 면천되거나 금군에 제수될 수 있었다. 이처럼 양란중에는 군공을 통해 하층민의 신분 향상이 합법적으로 가능하였으며, 이에 따라 신분이 혼효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하층민이 군공논상을 통해 신분을 향상시킬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이미 언급한바 서얼과 공사천은 참급무과에서 사족·양인과는 달리 別試를 치뤄야 許科하는 差待를 규정하고 있으며, 허통을 통해 유직자가 되었더라도 서반 종6품직의 主簿 이상을 주지 않는 군공자 한품서용이 법제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또한 원종공신과 전망자의 자손은 충장위·충익위·충찬위 입속이 가능하였더라도 3대 이후에는 양역에 편입되어야 했으므로 지속적인 신분상승이 법제적으로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공논상은 전란을 극복하고 군사의 사기를 높이려는 비상시 구급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감안할 때 전란이 종식되자 군공논상에 수반하는 제도적 신분상승 조처도 일단락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군공논상을 통한 신분의 혼효는 양란 이후 진행되어 가는 신분제 동요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양란중의 제도적 조처에 의한 신분상승의 길은 군공뿐만 아니라 納粟에 의해서도 가능하였다.0235)임란중의 納粟論賞에 관하여는 주로 다음의 글을 참고하였다.
田炳喆,<壬辰倭亂期 納粟政策>(≪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論叢 朝鮮時代史硏究≫, 1989).
平木實, 앞의 책.
李章熙, 앞의 글.
임란을 통해 재정적 타격을 받은 조선왕조는 특히 군량미 조달을 위한 납속을 통해 면천·면역·허통·補官의 길을 넓게 열었으며, 그것을 통해 서얼·향리·有役人·公私賤 등도 신분상승을 도모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군량을 마련하기 위해 선조 25년(1592) 5월부터 납속이 논의되었으나,0236)≪宣祖實錄≫권 26, 선조 25년 5월 정묘. 納粟論賞이 제도적으로 규정된 것은 선조 25년 12월에 경기·황해도에서 실시된<京畿黃海調度御史別事目>이 제정됨으로써 비롯되었다.0237)<宣祖實錄>권 33, 선조 25년 12월 을묘. 이 때에는 납속한 사람은 물론 그것을 수송한 사람에 대해서도 논상이 실시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표 1>과 같다.

 <표 1>에서 확인되는 本官守令·資窮者·前銜·鄕所 등은 實職·影職을 제수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그 이하의 신분인 서얼·향리·유역인·공사천은 許通·己身免役·從良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이로 볼 때 서얼은 물론 향리·유역양인과 공사천도 면역·종양됨으로써 일단 신분상승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신분\납속량 100석 이상 300석 이상 500석 이상 700석 이상
本官守令 加資 陞敍 超敍 超2階陞敍
資窮者 代加 代加2資 子壻中參下職除授  
前銜 加2資   復職 參下影職
鄕所以下 6品影職   4品影職  
庶孼 5년면역 10년면역 許通  
鄕吏·有役人 5년면역 10년면역 自身免役  
公私賤 5년면역 10년면역 從良  

<표 1>경기·황해 조도어사별사목

납속량 향 리 사 족 元有職者 資窮者 서 얼
3석 3년免役逐加1년 참하영직      
5석         兼司僕·羽林衛
咸西班軍職6品
8석   6품영직      
10석     매10석陞品    
15석 己身免役       허통
20석   동반9품     幷前所生
25석   동반8품      
30석 免鄕授參下影職 동반7품   陞당상 참하영직
40석 其2子免役參下影職 동반6품      
45석 相當軍職       6품영직
50석   동반5품     5품영직
60석   동반종4품     동반9품
80석 東班實職 동반정4품     동반8품
90석   동반종3품     동반7품
100석   동반정3품     동반7품

<표 2>납속사목

 그러나 선조 26년 2월에는 개정된<納粟事目>을 제정하였는데,0238)≪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신축.<표 2>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사족과 향리·서얼에 한정된 納粟補官을 규정하고 有役良人과 공사천을 제외하고 있다. 양반인 사족·원유직자·자궁자는 최하 영직에서 최고 동반 3품까지 허용하고, 향리는 3년 면역에서 동반 실직까지, 서얼은 겸사복·우림위 혹은 서반군직 6품에서 동반 6품까지 허용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양인과 공사천은 제외되어 있다. 양인의 납속은 군액이 감소된다는 이유로 금지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공사천의 면천은 오히려 군액 또는 稅源이 증가될 수 있는 것으로 신분변동에 따르는 문제만 없다면 금지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선조 26년 2월에 사간원에서 공사천의 면천종양은 당초의 사목대로 허용하자고 건의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져0239)≪宣祖實錄≫권 35, 선조 26년 2월 신해. ‘別事目’에는 있으나 ‘納粟事目’에 빠져 있던 납속면천이 결국 10일 뒤에 추가된 것으로 보이는데,0240)田炳喆, 앞의 글, 515∼516쪽. 15석 정도로 從良된 것으로 보인다.0241)平木實, 앞의 책, 168쪽. 또한 납속사목은 별사목보다 납속량이 뚜렷하게 줄어들었다. 이로 볼 때 향리와 서얼도 어느 정도의 경제적 여유만 있으면 동반실직에 제수될 수 있었다. 향리와 서얼은 16세기 이래 사족의 배타적 차별화 과정에서 족단적으로 밀려난 계층이었다. 그러나 임란중의 납속보관을 통해서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킬 수 있는 길이 제도적으로 열리게 된 셈이다.

 임란중에 납속을 통한 비양반층의 신분적 상승은 서얼이나 향리에 한정되지 않았다. 군역의 대상인 양인층도 제도적으로는 납속사목 이후 납속을 허용하지 않았지만 교생이나 한량을 의탁하거나 冒名하여 실제로 납속에 응하고 訓導나 影職을 받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0242)≪宣祖實錄≫권 38, 선조 26년 5월 을해. 공사천의 경우도 재력만 있으면 일단 면천종양하였다가 다시 상층 신분으로 오를 수 있었다. 임란기 납속이 신분에 미친 영향이 컸다는 것은 무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비양반층에 대한 실직 제수는 당시 사족 중심 신분질서하에서 명분론적 사회 인식이 이를 인정할 정도로 성숙되지 못해 현실적으로 어려웠고, 또 납속면역의 혜택도 별사목과 납속사목에서 3년 면역, 5년 면역, 10년 면역, 기신면역의 규정이 말해주듯이 자손에까지 미치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비양반층이 納粟品職을 취득했더라도 그 다음 세대인 아들은 취득 이전의 신분·직역을 세습하고 있으므로 양반과 같은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0243)李俊九,<朝鮮後期 兩班身分 移動에 관한 硏究(上)-丹城帳籍을 中心으로->(≪歷史學報≫96, 1982), 151∼152쪽. 따라서 비양반 납속품직자들은 그 혜택이 당대에 그쳐 납속만으로는 신분상승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임란기 납속을 통하여 일어날 수 있었던 신분변동은 비양반층의 양반화보다는 천인의 양인화라는 면이 더 강하게 나타났던 것이다.0244)田炳喆, 앞의 글, 540쪽.

 임란중의 납속논상을 통한 신분상승 조처는 전란이 마무리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선조 26년 2월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실시되었던 납속정책은 휴전이 성립된 뒤에도 飢民의 구제를 위해 다시 확대실시되었다가 정유재란이 끝나가는 선조 31년에 와서는 대체로 완화·정리단계로 들어갔다. 즉 납속인들에게 주었던 특전을 회수하고 募粟官을 줄여 나갔다. 그러다가 선조 33년 10월에는 드디어 미발급 空名告身을 수거하여 태우도록 한 결과 1만장 이상의 許通·免賤·免役等帖을 소각함으로써 임란중의 납속정책이 일단락되었던 것이다.0245)田炳喆, 위의 글, 519∼520쪽. 그러나 임란이 종식된 이후에도 전후 복구나 진휼을 위해 발급하던 공명첩은 효종대에 잠시 주춤하였으나 현종대 이후에도 납속책의 일환으로 계속 발급됨으로써 신분제 동요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이상 군공에 의한 논상과 원종공신 녹훈, 납속논상 등 일련의 제도적 조처는 일정한 한계가 있으나 합법적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하였고, 유공·유음의 혜택이 전망자 및 원종공신의 자손들에게 3대까지 미침으로써 한정된 범위내에서 신분상승을 도모할 수 있는 길도 있었다. 이에 따라 신분의 혼효현상도 초래하였다. 그러나 전란중의 제도적 신분상승 조처에 의한 신분의 혼효는 전란의 종식과 함께 더 이상 합법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그것은 전란이 종식되자 전란으로 인한 군공 및 납속 논상이 일단락되었고 그에 수반하던 제도적 신분상승 조처도 일단락됨으로써 이로 인한 하층민의 신분상승의 길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의 종식과 함께 제도적 신분상승 조처가 일단 정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진행되어 오던 신분의 혼효는 전란이 종식된 이후에도 신분제의 동요에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란을 치르면서 인구의 지역적 이동과 노비의 도망, 막대한 인명의 피해와 면역 인구의 증가 등은 民丁 파악의 곤란과 양역 인구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양역 인구의 감소는 양역 담당자의 부담을 가중시켰고, 양역의 과중한 부담은 有役下層民의 피역 시도를 유도하였다. 이는 결국 신분제의 혼효 내지 동요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처럼 전란을 통해 혼효되었던 신분질서는 號牌法 실시, 奴婢推刷 등 국가의 대책과 아울러 재지사족의 향촌사회 재건을 위한 노력을 통해서 재정비되어 갔다. 광해군 때의 호패법은 외적에 대비하기 위한 軍籍의 정비를 목적으로 광해군 2년(1610) 9월에 실시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제대로 실행되지도 못하다가 광해군 4년 7월에 혁파되었다.0246)李光麟,<號弊法-그 實施變遷을 中心으로->(≪白樂濬博士還甲紀念 國學論叢≫, 1955), 586∼595쪽. 그러나 反正을 통하여 왕위에 오른 인조 초기에는 반정의 합리화를 위한 현시적 욕구와 亂政의 극복이라는 실제적 필요성으로 인하여 개혁의 기운이 넘쳐 흘렀다. 이러한 흐름을 배경으로 實錄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訟事를 다투듯이 분분하게 개혁을 위한 의견들이 제기되었으며, 이 가운데 호패법을 先行하기로 인조 3년(1625) 7월 20일에 의논이 모아졌다. 이러한 결정을 거쳐 인조 3년 7월 28일에는 號牌事目이 작성되었고 이는 그 이듬해인 인조 4년 정월 1일부터 시행할 것을 명기하고 있다. 민정의 총수 및 役의 유무의 파악과 闕額을 보충하는 것이 호패법 시행의 주된 목적인 만큼 이를 위하여는 먼저 신분직역제의 정비가 선행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호패사목에는 품관으로부터 공사천에 이르기까지 신분과 직역에 따라 역의 유무를 밝힐 수 있는 각양 호패의 佩持를 규정하고 있다.0247)李俊九,<朝鮮後期의 ‘業儒’·‘業武’와 그 地位>(≪震檀學報≫60, 1985), 35∼37쪽. 이 호패법은 서얼 및 하층민의 노골적인 신분노출에 대한 반발 때문에 강력하게 지속적으로 시행되지 못하고 그 이듬해에 폐지되었지만, 임란을 통해 혼효되었던 신분은 호패법을 통해 일단 재정리되었으며, 그 이후 이를 바탕으로 신분직역제가 운용되어 갔다.

 또한 양란으로 인해 나타난 신분의 혼효는 효종 6년(1655)의 노비추쇄를 통해서도 재정비되어 갔다. 추쇄도감의 설치 목적은 노비에게서 신공을 거두어 재정에 보충하기 위해 먼저 노비를 파악하여야 할 필요에서 나왔다.0248)平木實, 앞의 책, 93∼94쪽. 그러나<推刷事目>과<備忘記>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隱漏奴婢를 밝혀내는 동시에 賤籍에 속해 있다가 冒良하여 司馬에 등과한 자의 자식에 대한 양인 처우, 노비의 군공·납속·納銀으로 인한 면천·면역·免貢을 허가한 公文이 없는 자는 還賤시킨다든지, 代口贖身에 대하여 연한에 제한을 가하는 규정0249)全炯澤,≪朝鮮後期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127∼132쪽. 등은 양란으로 신분이 혼효되어 있었던 하층민에 대한 신분제의 재정비를 수반하고 있다. 이같은 노비추쇄가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더라도 양란을 통해 나타난 신분의 혼효는 노비추쇄를 통해서도 일단 법제적으로 재정리되어 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재지사족의 향촌사회 재건을 위한 노력을 통해서도 신분질서는 재정비되어 갔다. 재지사족은 난 후 이완된 신분질서를 재정비, 강화하고 동요된 향촌사회를 다시 안정시키기 위해 향촌지배 조직과 규약을 복구 또는 새로이 마련하였다. 이러한 조직과 규약을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상하 신분질서와 지주·전호제의 안정적 유지 등이 추구되었으며,0250)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 統制策의 위기-洞契의 성격변화를 중심으로->(≪震檀學報≫58, 1984), 141쪽.
鄭震英, 앞의 글(1989), 106∼107쪽.
종전의 족계나 동계에 비해 새로 재정된 동규·동약에는 특히 하층민에 대한 규제조항이 강화되었다.0251)韓相權, 앞의 글, 61쪽.
李樹健,<古文書를 통해 본 朝鮮朝社會史의 一硏究>(≪韓國史學≫9, 1987), 85쪽.

 앞서 언급한 연기지방<일향입법>에 대한 조목별 검토를 통해 볼 때, 17세기 연기지방의 향촌사회는 ‘유향’ 중심의 신분질서를 구상하고 그 밑에 한산층, 상한층, 천민층이 설정되고 있으며, 그러한 등급에 따라 하급계층이 상급계층을 침욕하거나 분외의 직임을 맡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였다. 이러한 향촌민의 분한 등급과 그에 따른 규제는 재지사족이 전란 후 혼효된 향촌사회 신분질서를 재정비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한편 양란 이후 농업생산력의 향상, 상공업의 발전 등에 따라 피지배층의 자각과 사회경제적 기반의 확충은 유교적 신분제도하에서 강요되어 온 기득신분에의 속박에 대한 불만을 싹트게 하였고, 그것은 결국 신분을 상향이동시키려는 욕구로 표면화되었다. 이에는 물론 양란을 치르면서 인구의 지역적 이동과 군공·납속에 의한 제도적 신분상승 등으로 이미 신분계층의 혼효가 심화되었음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하였으며, 양역의 과중한 부담으로 인해 야기된 유역하층민의 피역 시도도 역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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