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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객사

[ 客舍 ]

요약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둔 관아 건축물로 각종 의례를 행하거나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지방에 머물때 사용하던 숙소이다.
전주 풍패지관

전주 풍패지관

객사(客舍)는 고려~조선시대에 각 지방에 세워졌던 관아 건축물로, 각종 의례를 행하고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이 지방에 머물때 사용하던 숙소이다. 고려시대 초기부터 객사가 지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지방 고을의 중심부에 객사가 세워졌다. 

객사의 역할과 기능

객사는 일반적으로 건물의 중앙에 있는 정청과 정청의 양 옆의 동·서익헌으로 구분된다. 정청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행하던 공간이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르면 망궐례 뿐만 아니라 전문(箋文)을 올리는 의식, 교서(敎書)를 받는 의식, 내향(內香)을 맞이하는 의식, 관찰사(觀察使)를 맞이하는 의식 등 여러 유교 의례 행사가 객사의 정청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정청의 양 옆의 동·서익헌에는 온돌방이 있어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 이용되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의례를 행하였기 때문에 유교국가였던 조선에서 객사는 숙소 이상의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었고,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東軒)보다 더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선시대의 거의 모든 지방 고을의 중심부에 객사가 세워졌고, 이를 통해 지방의 유교 질서를 확립하였다.

객사의 배치와 구성

조선 사회에서 객사는 유교적 상징성이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고을의 가장 중심에 세워졌고, 그 앞으로 각종 관아와 도로망이 구축되었다. 남북으로 배치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며, 홍살문, 문루, 외삼문, 내삼문, 객사가 축을 이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객사 건축물은 중앙의 정청과 양 옆의 동·서익헌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고, 의례적 공간이었던 정청이 동·서익헌보다 위계가 높은 건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정청의 기단과 지붕을 동·서익헌보다 한 단 높게 하였다. 정청의 내부 전체는 통칸으로 설계하였고 바닥에는 전돌(塼石)을 깔으며, 동·서익헌은 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하였다. 

객사의 쇠퇴

대한제국이 선포된 이후 객사에서 행해지던 망궐례와 각종 의례는 치루어지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객사로서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의 관청들을 없애버리는 식민지 정책에 따라 많은 객사가 불하(拂下: 국가에서 행정목적으로 사용이 끝났거나 불필요하게 된 토지나 건물 등의 재산을 팔아넘기는 일) 되었고, 남아있는 객사들 마저도 학교, 도서관 등 다른 목적으로 쓰이게 되면서 본래 객사의 모습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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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 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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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oop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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