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그때그이야기

<273>제3話 빨간 마후라 -23-체중 70kg이 40여kg으로 줄고

입력 2005. 03. 29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1:02
0 댓글
  • 1948년 4월 전주 3연대로 배속된 나는 이리 3대대 10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그리고 5·10 제헌의회 선거를 치르기 위해 전라북도 경비대장 보직을 받았다. 핫바지저고리 차림의 신병이 배당됐다. 이들을 보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 한숨부터 나왔다.
    문자 해독은커녕 ‘받들어 총’ 하나를 제대로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이들을 데리고 도내 선거 경비를 돈다는 것은 무리가 아니라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좌익 계열과 민족 진영은 남한 단독 선거를 보이코트하고 격렬한 반대 운동을 펴는 상황이어서 경찰력만으로 치안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결국 국방경비대까지 동원됐는데 나의 병력이 도무지 오합지졸인 것이다.
    나는 매일 차량에 이들을 분승시키고 도내를 돌았다. 전북은 의외로 산간 지역이 많은 곳이다. 금산군(당시에는 전북에 소속돼 있었음)을 시작으로 무주·완주·남원·순창 등 산악 지역에서 빨치산이 상당수 출몰했고, 실제로 5·10 선거를 치른 당일 두 곳에서 투표함을 빼앗긴 사건이 발생했다. 투표는 하루 만에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사흘에 걸쳐 치러졌기 때문에 치안 유지는 그만큼 힘들었다.
    나는 매일 병사들에게 군장을 시키고 카빈총을 집총하는 자세로 스리쿼터에 탑승시켜 산간을 돌게 했다. 비록 총 쏘는 법은 몰랐지만 이것만으로도 상당한 위협이 됐다.
    선거를 무사히 치르자 곧바로 육사 7기 후보생 교육대장 보직을 받았다. 육사 교육대는 서울·전주·부산 세 곳에 있었는데 나는 전주 교육대장(배속 생도 70명)이 된 것이다.
    연대본부는 전주 시내의 동쪽 끝에 있었고 교육대는 서쪽 끝에 있었다. 그 거리가 4km쯤 됐다. 모든 행정 처리는 연대본부에 가서 해야 되고, 하루 세 끼 식사도 연대본부에 달려가 하고 돌아와야 했다. 말하자면 아침밥 먹고 나면 점심 먹으러 달려가야 하고, 점심 먹고 나면 또 저녁 먹으러 달려가는 것이 일과이다시피 했다.
    거기에 나에게 배속된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나 혼자 다 하라는 것이다. 이러니 시간이 모자랐다. 교재 만들랴, 차트 만들랴, 훈련 계획서 준비하랴, 단 10분의 휴식도 허락되지 않았다.
    도리 없이 빠르고 똘똘한 후보생을 시켜 식사를 항고(반합)에 담아 오도록 했다. 식사는 맨보리밥에 무국, 그리고 짠 김치 쪼가리가 전부였다. 생도가 이것을 항고에 담아 달려오다 보니 뒤섞여 완전 돼지밥이 돼 있었다. 어떤 때는 넘어져 엎지른 탓에 국물은 흔적도 없고 흙·모래가 섞인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식사를 하다 보니 나는 평소 체중이 70kg은 거뜬히 나갔는데 2개월쯤 후에는 40kg 정도로 쑥 빠져 버렸다. 아내는 광주 친정에 보내 놓고 있었는데 일요일에 내려가 보려 해도 짬이 없어 갈 엄두도 안 났지만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어서 한 시간 반 거리를 단 한 번도 내려가지 않았다.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때에 갑자기 통위부 출장 명령이 떨어졌다. 옳다구나 하고 서울에 올라가 보니 포병대 창설을 위해 각 연대별 우수 장교를 뽑아 올리고 있었다. 육사 5기생이 주축인데 10여 명이 올라와 있었다. 3연대에서는 이미 다른 장교를 보냈으나 퇴짜 맞고 나를 재차 보낸 것이었다. 이때 통위부 작전국장으로 있던 일본 육사 59기 출신인 강문봉이 바싹 마른 나를 보자마자 “아니, 너 여기는 왜 왔나”하고 놀라는 것이었다.
    “포병대 창설 요원으로 뽑힌 것 같아.”
    “너는 항공대 아냐? 항공대로 가야지.”
    “그러게 말야.”
    강문봉이 눈치를 채고 “야, 그냥 내려가 버려”하는 것이다. 당시 군대는 그랬다. 그러나 돌아가기에는 지긋지긋한 식사 때문에 망설여졌고, 그렇다고 병과가 항공과인 내가 포병으로 가기에도 주저됐다. 나는 강문봉이 지시한 대로 곧바로 전주로 내려오고 말았다. 내려오자마자 다시 항공대 배속 명령이 떨어졌다. 급히 상경해 수색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서울에 있을 때 명령을 내리지.”
    하루 이틀 사이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거추장스러워 하는 군소리였으나 내가 원하는 병과로 가게 되니 마음은 가뿐했다. 물론 이 작업은 강문봉이 한 일이었다.

    〈이계홍 용인대 겸임교수·인물전문기자〉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댓글 0

    오늘의 뉴스

    Hot Photo News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