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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6>老兵이 걸어온 길-116-미군의 반대를 뚫다

입력 2008. 12. 01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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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미8군사령관 테일러 장군에게 완곡하지만 분명하게 의사를 밝혔다. 한국군 인사는 총장의 고유 권한이라고. 장성진급 예정자들은 모두 선발시험을 거쳐 뽑힌 우수한 장교들이라는 것도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 못 미더우면 같이 면담해 보고 결정하자”고 제안했다. 협조기관의 수장에게 내 고집만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그 말에 테일러 장군의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는 동석한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장군에게 “귀관이 나를 대신해 그들을 면담해 보고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 길로 라이언 장군과 함께 화천으로 향했다. 2군단 창설 때 연을 맺은 화천 소토고미리 제5포병단에 도착해 라이언 장군은 메이요 포병단장에게 예비 장성 후보자들의 개인기록카드를 요청했다. 한 사람씩 불러 면접시험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16명 모두의 면접을 통역했다. 라이언 장군이 묻는 말과 수험자가 대답하는 말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양쪽에 옮겼다.

    “모두 우수합니다. 이만한 장교들을 어디서 구하겠습니까?”

    면접을 마친 라이언 장군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전원 합격판정이었다. 특히 박정희 대령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참모총장으로서 통역장교 노릇을 한 보람을 느꼈다.라이언 장군에게서 보고를 받은 테일러 8군사령관은 더 군말이 없었다. 그렇게 하여 한국 육군에 16명의 포병장성이 한꺼번에 태어났다.

    “한국군 인사는 총장 권한” 강조

    박정희 대령을 비롯해 박경원(내무장관 지냄)·이기건(준장 예편)·이명제(소장 예편)·송석하(소장 예편)·이창정(소장 예편)·김영주(준장 예편)·최경만(준장 예편)·박현수(소장 예편)·김동수(준장 예편)·이춘경(준장 예편)·김상복(중장 예편)·이희권(준장 예편)·김동빈(중장 예편)·강태민(소장 예편)·이백우(준장 예편) 등이 그들이다.

    이렇게 포병지휘관이 많이 양성되고 미군으로부터 포병장비 지원을 받아 우리 포병은 그 전력이 단기간에 크게 향상됐다. 각 사단에 105mm 포 1개 대대와 연대에 4.2인치 박격포 소대가 고작이던 초창기 전력이 사단마다 4개 포병대대를 갖게 된 것이다. 중포부대인 155mm 포병대대도 3개 대대씩 증강 배치돼 어느 나라 포병에도 뒤지지 않게 됐다.

    클라크 장군, 상이 포로 교환 제안

    이런 포병부대를 신임 포병장성들에게 맡겨 각 사단 포병사령관으로 배치했다. 훗날 박정희 대통령 시절 포병 출신 장성들이 정부 요직과 각급 기관장에 많이 발탁됐던 것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그해 4월에는 상이(傷痍) 포로 교환이 있었다. 스탈린 사후 휴전회담이 급속히 진전됐다.

    클라크 장군은 그해 3월 “휴전협정 체결 전에 우선 포로 가운데 병들거나 부상이 심한 사람들부터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이것을 팽덕회 중공군 총사령관과 김일성이 받아들여, 전쟁 발발 후 처음으로 포로교환이 성사됐다.

    상이포로 교환은 ‘리틀 스위치’(Little Switch)라고 했다. 적지만 우선 급한 사람부터 교환하자는 뜻이었다. 리틀 스위치 국군 측 인수단장에 나는 최석 소장을 임명했다.포로교환은 1953년 4월 20일부터 5월 3일까지 판문점에서 이뤄졌다.

    이때 포로교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최 소장으로부터 아군 귀환자가 공산군 측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것은 우리 측 포로를 괴뢰군에 편입시킨 때문이라는 보고를 받은 기억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우리가 넘겨준 포로는 인민군 5194명, 중공군 1030명이었다. 그에 반해 우리가 공산 측으로부터 인수받은 포로는 국군 471명, 유엔군 149명이었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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