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삼국사기 > 百濟本紀 第四 > 武寧王 >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 501년 01월(음) )

春正月, 佐平苩加據加林城叛, 王帥兵馬至牛頭城, 命扦校勘 015015 《삼국사절요》에는 扞으로 되어 있다.닫기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校勘 016016 《삼국사절요》 및 주자본에 의거하여 曰로 표기함이 옳다.닫기

校勘 015
《삼국사절요》에는 扞으로 되어 있다.
校勘 016
《삼국사절요》 및 주자본에 의거하여 曰로 표기함이 옳다.
주제분류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군사>반란>진압
정치>법률>형법>형집행
색인어
이름 : 苩加, 解明
지명 : 白江

백가가 가림성에서 반란을 일으키다 ( 501년 01월(음) )

〔원년〕 봄 정월에 좌평 백가가 가림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001001 좌평 백가가 … 반란을 일으키니 : 동성왕을 죽인 23년의 정변의 주체는 본서에 보이는 것처럼 백가와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502)조에 보이는 국인들로 크게 나뉜다. 먼저, 백가 주동설은 사비 경영에 반대한 백가에 의한 피살로 보는 입장이다(兪元載, 1996, 86쪽). 이러한 입장을 따라 정변이 발생한 이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으로 무령왕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즉위하였다는 것이다(오계화, 2004, 11~14쪽). 그러나 왕을 시해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더욱이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가 쉽게 항복을 한 점 등 여러 면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에 동성왕에 반대하는 세력, 즉 국인세력으로 보는 견해(盧重國, 1991, 23~14쪽; 鄭載潤, 1997, 103~119쪽)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동성왕에 반대하는 세력은 남래귀족과 웅진 부근 토착세력으로 거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백가를 끌어들인 것이며, 백가는 정변 후에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굳어지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무령왕이 출동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러 항복하였다는 것이다(정재윤, 1997, 118~119쪽). 국인들을 거사의 중심으로 볼 경우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고, 이 경우 무령왕이 간여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일치된다.
〈참고문헌〉
盧重國, 1991,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21.
兪元載, 1996, 「百濟 加林城 硏究」, 『百濟論叢』 5, 백제문화개발연구원.
鄭載潤, 1997, 「東城王 23年 政變과 武寧王의 執權」, 『韓國史硏究』 99・100.
오계화, 2004, 「百濟 武寧王의 出自와 王位繼承」, 『韓國古代史硏究』 32.
닫기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002002 우두성 :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8년(486)조 참조닫기에 이르러 한솔 해명(解明)003003 해명(解明) : 백제 무령왕대의 귀족으로, 대성팔족의 하나인 해씨 출신이다. 해명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보아 동성왕 23년 정변에 참여한 귀족 세력의 하나로 보인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다.닫기에게 토벌을 명하였다. 백가가 나와 항복하자 왕이 그의 목을 베어 백강004004 백강 : 현재의 금강을 말한다. 고대사회에서 강은 구간별로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부여 인근에 있는 금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닫기에 던졌다.

註 001
좌평 백가가 … 반란을 일으키니 : 동성왕을 죽인 23년의 정변의 주체는 본서에 보이는 것처럼 백가와 『日本書紀』 권16 武烈紀 4년(502)조에 보이는 국인들로 크게 나뉜다. 먼저, 백가 주동설은 사비 경영에 반대한 백가에 의한 피살로 보는 입장이다(兪元載, 1996, 86쪽). 이러한 입장을 따라 정변이 발생한 이후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사람으로 무령왕밖에 없어 자연스럽게 즉위하였다는 것이다(오계화, 2004, 11~14쪽). 그러나 왕을 시해한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고, 더욱이 반란을 일으킨 당사자가 쉽게 항복을 한 점 등 여러 면에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이에 동성왕에 반대하는 세력, 즉 국인세력으로 보는 견해(盧重國, 1991, 23~14쪽; 鄭載潤, 1997, 103~119쪽)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동성왕에 반대하는 세력은 남래귀족과 웅진 부근 토착세력으로 거사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백가를 끌어들인 것이며, 백가는 정변 후에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굳어지자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고, 무령왕이 출동하자 억울함을 호소하러 항복하였다는 것이다(정재윤, 1997, 118~119쪽). 국인들을 거사의 중심으로 볼 경우 이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였고, 이 경우 무령왕이 간여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일치된다.
〈참고문헌〉
盧重國, 1991, 「百濟 武寧王代의 集權力 强化와 經濟基盤의 擴大」, 『百濟文化』 21.
兪元載, 1996, 「百濟 加林城 硏究」, 『百濟論叢』 5, 백제문화개발연구원.
鄭載潤, 1997, 「東城王 23年 政變과 武寧王의 執權」, 『韓國史硏究』 99・100.
오계화, 2004, 「百濟 武寧王의 出自와 王位繼承」, 『韓國古代史硏究』 32.
註 002
우두성 : 본서 권26 백제본기4 동성왕 8년(486)조 참조
註 003
해명(解明) : 백제 무령왕대의 귀족으로, 대성팔족의 하나인 해씨 출신이다. 해명은 백가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으로 보아 동성왕 23년 정변에 참여한 귀족 세력의 하나로 보인다.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보이지 않는다.
註 004
백강 : 현재의 금강을 말한다. 고대사회에서 강은 구간별로 명칭이 달랐기 때문에 부여 인근에 있는 금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주제분류
정치>군사>반란>모의·作亂
정치>군사>반란>진압
정치>법률>형법>형집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