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울의 조선인 위안부 2백여명 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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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日本군속 證言,"잠수함 이동중 폭사"

(東京=聯合)金溶洙기자= 태평양전쟁중 남서태평양 뉴브리튼의 라바울에 끌려갔던 한국인 종군위안부 2백여명이 일본해군의 명령에 따라 잠수함으로 이동하던 중 잠수함이 수뢰에 부딪치는 바람에 몰사했다고 당시 라바울에서 해군군속으로 근무했던 시라이 가쓰도시氏(白井勝俊.75.千葉縣 柏市 條籠田 1382)가 9일 밝혔다.

시라이氏는 이날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육.해군 병력 10여만명이 주둔중이던 라바울에는 육군에 3백명, 해군에 2백명의 조선인 위안부가 각각 배치돼 있었다"며 "44년12월 `가스미가우라'(霞浦)해군항공대 지시로 해군소속의 위안부 2백명이 연합군 공습을 피해 잠수함에 실려 섬을 빠져 나가다 잠수함이 미군이 설치한 수뢰와 충돌, 침몰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했다.

해군항공대 비행기의 정비공으로 근무하던중 위안부 집결작업을 거들었다고 밝힌 그는 "미군의 공습이 본격화되자 군인들이 먼저 빠져나간 뒤 마지막으로 남은 1척의 잠수함에 위안부들을 승선시켰었다"고 말했다.

시라이氏는 이어 "해군兵曺長의 인솔에 따라 위안부를 실은 잠수함(2천톤급 이상)이 라바울과 바로 앞 `요구'섬 사이,폭 2㎞의 해협을 빠져나가기 위해 1㎞가량 항해하던 중 잠수도 채 안된 상태에서 폭발음과 함께 침몰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뒤 탈출로를 찾던 중 뉴브리튼을 점령한 오스트레일리아군에 의해 포로로 잡힌 후 46년3월 귀환한 그는 "침몰 당시에는 생존자가 없는 줄 알았으나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제주도 출신 위안부 3명이 살아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이들은 아마 지금도 요구섬 등 뉴브리튼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라바울에는 당시 조선인 해군 특별 지원병 1백50여명으로 편성된 나니와(浪花)부대가 있었는데 폭격 등으로 이들 대부분이 사망했다"면서 "이들 가운데 살아서 한국으로 돌아간 사람들 중에는 당시의 위안부 몰사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라이氏는 이와 함께 "뉴브리튼의 `세레베스'섬 `마가스사루'지역에서는 일본군이 인도네시아 여성들을 간호보조원이라는 명목으로 끌고 와 실제로는 위안부로 전락시켰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시라이氏의 이같은 증언은 일본군이 위안부들을 잠수함에 태운 배경에 대해 종전에 그가 주변의 극소수 사람들에게 밝힌 내용과는 다소 엇갈리는것이다.

10여년전 노인회에서 만나 그와 가깝게 지내왔다는 재일교포 鄭正募씨(73.柏市거주)에 따르면 시라이氏는 당초 라바울에 주둔하던 일본군이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해지자 조선인 위안부들의 처리문제를 놓고 고심하던 중 자신들이 먼저 도주하고 위안부들을 귀국시켜 주겠다며 마지막 잠수함에 태운뒤 수뢰가 깔린 바다로 내몰았으며 생존자 3명의 이야기도 항공대본부에서 전해들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한편 시라이氏는 "라바울 근무중 머리를 다쳤으나 군속이라는 이유로 恩給 등 원호혜택을 받지 못해 지금도 당시 부상사실을 입증해 줄 부대상관을 찾고 있는 중"이라면서 일본은 이처럼 조선여자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 몰사시킨 잘못을 시인해야 하며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군사전략 요충지였던 라바울에는 2천여명의 조선인들이 군속, 징용노무자 등으로 끌려와 비행장 건설및 진지구축작업 등에 동원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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