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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의자왕

[ 義慈王 ]

원전서지 삼국사기 제28권 백제본기 제6(三國史記 卷第二十八 百濟本紀 第六)
시대명 백제
재위기간 641년 ~ 660년
연도 641년 ~ 665년

의자왕(義慈王)은 무왕(武王)의 맏아들이다.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 재위 33년(서기 632)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므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 무왕이 돌아가시자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당 태종이 사부랑중(祠部郞中) 정문표(鄭文表)를 보내 왕을 주국대방군왕백제왕(柱國帶方郡王百濟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8월, 당(唐)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의를 표하고 아울러 토산물을 바쳤다.

義慈王 武王之元子 雄勇有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 武王薨 太子嗣位 太宗遣祠部郞中鄭文表 冊命爲柱國帶方郡王百濟王 秋八月 遣使入唐 表謝 兼獻方物

1. 의자왕 2년(서기 642)

2년(서기 64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2월, 임금이 주와 군을 두루 둘러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수들을 살펴서 사형수만 제외하고 모두 용서해 주었다.
가을 7월, 임금이 직접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獼猴) 등 40여 성을 함락하였다.

8월,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였다. 성주인 품석(品釋)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하였는데,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 남녀 1천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의 주와 현에 나누어 살게 하고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하였다. 임금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섬을 주었다.

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二月 王巡撫州郡 慮囚 除死罪皆原之 秋七月 王親帥兵 侵新羅 下獼猴等四十餘城 八月 遣將軍允忠 領兵一萬 攻新羅大耶城 城主品釋與妻子出降 允忠盡殺之 斬其首 傳之王都 生獲男女一千餘人 分居國西州縣 留兵守其城 王賞允忠功 馬二十匹穀一千石

2. 의자왕 3년(서기 643)

3년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1월, 임금이 고구려와 화친을 맺었는데, 신라의 당항성(党項城)을 빼앗아 신라가 당나라로 조공하러 가는 길을 막기 위해서였다. 임금이 마침내 병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왕 덕만(德曼,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병사를 철수하였다.

三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冬十一月 王與高句麗和親 謀欲取新羅党項城 以塞入朝之路 遂發兵攻之 羅王德曼遣使 請救於唐 王聞之罷兵

3. 의자왕 4년(서기 644)

4년(서기 644)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당 태종이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獎)을 양국에 보내 알아듣도록 타일렀다. 임금이 표문을 올려 사죄하였다. 왕자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가을 9월, 신라 장군 유신(庾信)이 병사를 거느리고 침범하여 일곱 성을 빼앗아갔다.

四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太宗遣司農丞相里玄獎 告諭兩國 王奉表陳謝 立王子隆爲太子 大赦 秋九月 新羅將軍庾信領兵來侵 取七城

4. 의자왕 5년(서기 645)

5년(서기 645) 여름 5월, 임금이 당 태종이 직접 고구려를 치면서 신라에서 병사를 징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 틈을 타서 신라를 습격하여 7개 성을 빼앗으니, 신라에서 장군 유신을 보내 침범하였다.

五年 夏五月 王聞太宗親征高句麗 徵兵新羅 乘其間 襲取新羅七城 新羅遣將軍庾信 來侵

5. 의자왕 7년(서기 647)

7년(서기 647) 겨울 10월, 장군 의직(義直)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나아가 신라의 무산성(茂山城) 아래에 주둔하고, 병사를 나누어 감물(甘勿)과 동잠(桐岑) 두 성을 공격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장수와 병졸을 격려하며 결사적으로 싸워서 아군을 크게 깨뜨리니,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왔다.

七年 冬十月 將軍義直 帥步騎三千 進屯新羅茂山城下 分兵攻甘勿桐岑二城 新羅將軍庾信 親勵士卒 決死而戰 大破之 義直匹馬而還

6. 의자왕 8년(서기 648)

8년(서기 648) 봄 3월, 의직이 신라 서쪽 변경의 요차(腰車)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여름 4월, 옥문곡(玉門谷)으로 진군하였다. 신라 장군 유신이 막아서 두 번 싸워 크게 패하였다.

八年 春三月 義直襲取新羅西鄙腰車等一十餘城 夏四月 進軍於玉門谷 新羅將軍庾信逆之 再戰大敗之

7. 의자왕 9년(서기 649)

9년(서기 649) 가을 8월, 임금이 좌장(左將) 은상(殷相)을 보내 정예 병사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石吐) 등 일곱 성을 공격해서 빼앗게 하였다. 신라 장수 유신, 진춘(陳春),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이 이를 맞받아 공격하였으나 불리해지자, 흩어진 병졸을 모아 도살성(道薩城) 아래 진을 치고 다시 싸웠다. 우리 병사가 패배하였다.
겨울 11월, 우레가 쳤고, 물이 얼지 않았다.

九年 秋八月 王遣左將殷相 帥精兵七千 攻取新羅石吐等七城 新羅將庾信陳春天存等 逆擊之 不利 收散卒 屯於道薩城下 再戰 我軍敗北 冬十一月 雷 無氷

8. 의자왕 11년(서기 651)

11년(서기 651),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이 돌아올 때 고종(高宗)이 조서를 내려 임금을 타일렀다.

“해동의 세 나라는 나라를 연지 오래되고 국토가 나란히 붙어, 국경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이다. 근래에 이르러 마침내 사이가 벌어져 전쟁을 번갈아 일으켜 거의 편안한 해가 없다. 이리하여 마침내 세 나라의 백성들은 목숨을 칼도마 위에 올려놓은 상황이 되었으며, 무기를 쌓아놓고 분풀이 하는 일이 아침저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짐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입장으로써 이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지난해에 고구려와 신라의 사신들이 함께 와서 조회하였을 때, 나는 이와 같은 원한을 풀고 다시 화목하고 돈독하게 지내라고 명령하였었다.

신라 사신 김법민(金法敏, 뒷날의 문무왕)이 아뢰기를 ‘고구려와 백제는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의지하면서 병사를 일으켜 번갈아 우리를 침범하니, 우리의 큰 성과 중요한 진을 모두 백제에게 빼앗겨 국토는 날로 줄어들고 나라의 위엄과 힘도 떨어졌습니다. 원컨대 백제에 조칙을 내려 빼앗은 성을 돌려주라고 해주십시오. 만일 명령을 받들지 않는다면 즉시 우리 스스로 병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잃었던 옛 땅만을 되찾으면 즉시 화친을 맺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의 말이 도리에 맞았기 때문에 짐은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제나라 환공(桓公)은 제후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멸망하는 나라를 구원해 주었는데, 하물며 짐은 만국의 군주로서 어찌 위급하게 된 번국을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왕은 빼앗은 신라의 성을 모두 돌려주고, 신라도 사로잡은 백제 포로들을 왕에게 돌려보내야 한다. 그렇게 한 후에야 근심이 풀리고 분쟁이 해소될 것이다. 무기를 거두고 갑옷을 풀어야 백성들은 쉬고 싶어하는 소망을 이룰 것이며, 세 나라는 전쟁의 괴로움을 잊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변경에서는 피를 흘리고 영토 전부에 시체가 쌓이며 농사와 길쌈이 모두 피폐하여 남녀 모두가 의지할 곳이 없어지는 것과 어찌 한 가지로 같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왕이 만약 이 분부를 따르지 않는다면 짐은 법민의 요청대로 신라가 왕과 결전하도록 내버려둘 것이다. 또한 고구려에게 약속을 맺게 하여, 백제와 서로 멀리서 구원하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고구려가 만일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면 즉시 거란과 여러 번국들에게 명령하여 요수를 건너가 약탈하게 할 것이다. 왕은 짐의 말을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많은 복을 얻도록 할 것이며, 좋은 방책을 찾아 도모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라.”

十一年 遣使入唐朝貢 使還 高宗降璽書 諭王曰 海東三國 開基日久 並列疆界 地實犬牙 近代已來 遂構嫌隙 戰爭交起 略無寧歲 遂令三韓之氓 命懸刀俎 築戈肆憤 朝夕相仍 朕代天理物 載深矜憫 去歲 高句麗新羅等使 並來入朝 朕命釋玆讎怨 更敦款睦 新羅使金法敏奏言 高句麗百濟 脣齒相依 竟擧干戈 侵逼交至 大城重鎭 並爲百濟所倂 疆宇日蹙 威力並謝 乞詔百濟 令歸所侵之城 若不奉詔 卽自興兵打取 但得古地 卽請交和 朕以其言旣順 不可不許 昔 齊桓列士諸侯 尙存亡國 况朕萬國之主 豈可不恤危藩 王所兼新羅之城 並宜還其本國 新羅所獲百濟俘虜 亦遣還王 然後 解患釋紛 韜戈偃革 百姓獲息肩之願 三蕃無戰爭之勞 比夫流血邊亭 積屍疆紛 耕織並廢 士女無聊 豈可同年而語哉 王若不從進止 朕已依法敏所請 任其與王決戰 亦令約束高句麗 不許遠相救恤 高句麗若不承命 卽令契丹諸藩 度遼 深入抄掠 王可深思朕言 自求多福 審圖良策 無貽後悔

9. 의자왕 12년(서기 652)

12년(서기 652) 봄 정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十二年 春正月 遣使入唐朝貢

10. 의자왕 13년(서기 653)

13년(서기 653) 봄, 크게 가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다.
가을 8월, 임금이 왜국과 우호 관계를 맺었다.

十三年 春 大旱 民饑 秋八月 王與倭國通好

11. 의자왕 15년(서기 655)

15년(서기 655) 봄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였는데 대단히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궁궐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여름 5월, 붉은 색의 말이 북악 오함사(烏含寺)에 들어가, 불당을 울면서 돌아다니다가 며칠 후에 죽었다.
가을 7월, 마천성(馬川城)을 수리하였다.

8월, 임금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의 30여 개의 성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신라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고 표문을 올려 ‘백제가 고구려와 말갈과 함께 우리의 북쪽 경계에 침범하여 30여 곳의 성을 함락시켰다.’고 하였다.

十五年 春二月 修太子宮 極侈麗 立望海亭於王宮南 夏五月 騂馬入北岳烏含寺 鳴匝佛宇數日死 秋七月 重修馬川城 八月 王與高句麗靺鞨 攻破新羅三十餘城 新羅王金春秋 遣使朝唐 表稱 百濟與高句麗靺鞨 侵我北界 沒三十餘城

12. 의자왕 16년(서기 656)

16년(서기 656) 봄 3월, 임금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혹은 정충(淨忠)이라고 한다.]이 적극적으로 말리자, 임금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어졌다.

성충은 옥에서 야위어 죽게 되었는데, 죽을 때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말씀 아뢰고 죽겠습니다. 신이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데 반드시 전쟁은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서는 반드시 지형을 잘 살펴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른 나라 병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沈峴)을 지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의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야만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임금은 이 말을 살피지 않았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 淫荒耽樂 飮酒不止 佐平成忠[或云淨忠] 極諫 王怒 囚之獄中 由是 無敢言者 成忠瘐死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 王不省焉

13. 의자왕 17년(서기 657)

17년(서기 657) 봄 정월, 임금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 식읍을 주었다.
여름 4월, 크게 가뭄이 들어 논밭이 붉은 땅이 되었다.

十七年 春正月 拜王庶子四十一人爲佐平 各賜食邑 夏四月 大旱 赤地

14. 의자왕 19년(서기 659)

19년(서기 659) 봄 2월, 여우떼가 궁궐에 들어왔는데,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에 올라앉았다.
여름 4월, 태자궁에서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하였다.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獨山)과 동잠(桐岑) 두 성을 침범하였다.
5월, 왕도 서남쪽 사비하에서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었다.
가을 8월,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내려 왔는데 길이가 18척이었다.
9월, 대궐 뜰에 있는 홰나무가 울었는데 마치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으며, 밤에는 궁궐 남쪽 길에서 귀신이 곡을 하였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 雌雞與小雀交 遣將侵攻新羅獨山桐岑二城 五月 王都西南泗沘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 鬼哭於宮南路

15. 의자왕 20년(서기 660)

20년(서기 660)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쪽 바닷가에서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사비하(泗沘河)의 물이 핏빛처럼 붉어졌다.

여름 4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여들었다. 왕도의 시장 사람들이 까닭 없이 놀라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이에 넘어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天王寺)와 도양사(道讓寺)의 두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 백석사(白石寺)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동쪽과 서쪽 공중에서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二十年 春二月 王都井水血色 西海濱 小魚出死 百姓食之 不能盡 泗沘河水 赤如血色 夏四月 蝦蟆數萬 集於樹上 王都市人 無故驚走 如有捕提者 僵仆而死百餘人 亡失財物 不可數 五月 風雨暴至 震天王道讓二寺塔 又震白石寺講堂 玄雲如龍 東西相鬪於空中

6월, 왕흥사(王興寺)의 여러 승려들이 모두 배의 돛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의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으로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왕도의 여러 개들이 길가에 모여서 짖기도 하고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곧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궐 안에 들어와서 큰소리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라고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임금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 자쯤 깊이에 거북이 한 마리가 있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고 쓰여 있었다.

임금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게 되는 것이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

임금이 노하여 그를 죽여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하다는 것이니, 생각해보건대 우리나라는 왕성해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해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기뻐하였다.

六月 王興寺衆僧皆見 若有船楫 隨大水 入寺門 有一犬狀如野鹿 自西至泗沘河岸 向王宮吠之 俄而不知所去 王都群犬集於路上 或吠或哭 移時卽散 有一鬼入宮中 大呼 百濟亡 百濟亡 卽入地 王怪之 使人掘地 深三尺許 有一龜 其背有文曰 百濟同月輪 新羅如月新 王問之巫者 曰 同月輪者滿也 滿則虧 如月新者未滿也 未滿則漸盈 王怒殺之 或曰 同月輪者盛也 如月新者微也 意者國家盛 而新羅寖微者乎 王喜

당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을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左衛將軍) 유백영(劉伯英),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 풍사귀(馮士貴)와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 방효공(龐孝公) 등과 함께 병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자기 나라 병사를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병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의 서쪽 덕물도(德物島)에 이르자, 신라왕은 장군 김유신을 보내 정예병 5만 명을 거느리고 당나라 병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임금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싸우는 것과 지키는 것 중 어느 것이 마땅한 지를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서서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물에 익숙하지 못한 자들이 배를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이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미처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원조를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두려워서 감히 날쌔게 진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의 병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습니다.”

高宗詔 左衛大將軍蘇定方 爲神丘道行軍大摠管 率劉伯英右武衛將軍馮士貴左驍衛將軍龐孝公 統兵十三萬 以來征 兼以新羅王金春秋 爲嵎夷道行軍摠管 將其國兵 與之合勢 蘇定方引軍 自城山濟海 至國西德物島 新羅王遣將軍金庾信 領精兵五萬以赴之 王聞之 會群臣 問戰守之宜 佐平義直進曰 唐兵遠涉溟海 不習水者 在船必困 當其初下陸 士氣未平 急擊之 可以得志 新羅人恃大國之援 故有輕我之心 若見唐人失利 則必疑懼 而不敢銳進 故知先與唐人決戰 可也

달솔 상영(常永) 등이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빨리 싸우려 할 것이니 그 기세를 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이전에 여러 번 우리 군대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병사의 기세를 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나라 병사들의 길목을 막아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대로 하여금 신라군을 쳐서 날카로운 기세를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합세해서 싸운다면 군대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금이 머뭇거리며 어느 쪽 말을 따라야 할지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다. 임금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는 숫자가 많고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더불어 우리의 앞뒤에서 작전을 함께 하고 있으니, 만약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싸운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白江)[혹은 기벌포(伎伐浦)라고도 한다.]과 탄현(炭峴)[혹은 침현(沈峴)이라고도 한다.]은 우리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이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해낼 수 있는 곳이니, 마땅히 용감한 병사를 뽑아서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나라 병사가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병사가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장수와 병졸들이 지칠 때를 기다린 후에 힘을 떨쳐 공격한다면 반드시 저들을 쳐부술 수 있을 것입니다.”

達率常永等曰 不然 唐兵遠來 意欲速戰 其鋒不可當也 新羅人前屢見敗於我軍 今望我兵勢 不得不恐 今日之計 宜塞唐人之路 以待其師老 先使偏師 擊羅軍 折其銳氣 然後 伺其便而合戰 則可得以全軍 而保國矣 王猶豫 不知所從 時 佐平興首得罪 流竄古馬彌知之縣 遣人問之曰 事急矣 如之何而可乎 興首曰 唐兵旣衆 師律嚴明 况與新羅共謀掎角 若對陣於平原廣野 勝敗未可知也 白江[或云伎伐浦]炭峴[或云沈峴] 我國之要路也 一夫單槍 萬人莫當 宜簡勇士 往守之 使唐兵不得入白江 羅人未得過炭峴 大王重閉固守 待其資粮盡 士卒疲 然後奮擊之 破之必矣

이때 대신들이 이를 믿지 않고 말하였다.
“흥수는 오랫동안 옥중에 있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니, 그의 말을 따라서는 안됩니다. 당나라 병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해서 강물을 따라 배를 나란히 가도록 할 수 없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이때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면, 그것은 마치 닭장에 든 닭과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일과 같을 것입니다.”

임금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임금은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서 장군 계백(堦伯)을 보내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 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계백은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병사가 적고 힘이 다해 마침내 패배하였다. 계백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이에 임금은 병사를 합해서 웅진 어귀를 막고 강을 따라 주둔시켰다. 소정방은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들과 싸웠으나 우리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於時 大臣等不信曰 興首久在縲紲之中 怨君而不愛國 其言不可用也 莫若使唐兵入白江 沿流而不得方舟 羅軍升炭峴 由徑而不得幷馬 當此之時 縱兵擊之 譬如殺在籠之雞離網之魚也 王然之 又聞唐羅兵已過白江炭峴 遣將軍堦伯 帥死士五千 出黃山 與羅兵戰 四合皆勝之 兵寡力屈 竟敗 堦伯死之 於是 合兵禦熊津口 瀕江屯兵 定方出左涯 乘山而陣 與之戰 我軍大敗

당나라 병사들이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며 떠들어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전사자가 1만여 명이었다. 당나라 병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임금이 사태를 벗어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드디어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임금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자 융(隆)에게 말하였다.
“임금은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약 당나라 병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목숨을 보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니 백성들도 모두 그의 뒤를 따랐다. 태는 이를 중지시키지 못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곽에 뛰어 올라 당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였다. 태는 형세가 다급해지자 성문을 열고 살려주기를 청하였다. 이때 임금 및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정방이 임금 및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2천8백7명을 당나라 서울로 압송하였다.

王師乘潮 舳艫銜尾進 鼓而譟 定方將步騎 直趍其都城 一舍止 我軍悉衆拒之 又敗 死者萬餘人 唐兵乘勝薄城 王知不免 嘆曰 悔不用成忠之言 以至於此 遂與太子孝 走北鄙 定方圍其城 王次子泰 自立爲王 率衆固守 太子子文思 謂王子隆曰 王與太子出 而叔擅爲王 若唐兵解去 我等安得全 遂率左右 縋而出 民皆從之 泰不能止 定方令士超堞 立唐旗幟 泰窘迫 開門請命 於是 王及太子孝與諸城皆降 定方以王及太子孝王子泰隆演及大臣將士八十八人百姓一萬二千八百七人 送京師

백제는 본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때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두고 각각 주와 현들을 통솔하게 하였으며,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都督), 자사(刺史), 현령(縣令)을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도성을 지키게 하였고, 또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남은 백성들을 달래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황제에게 보이니, 황제가 그들을 꾸짖고는 용서하여 주었다. 임금이 병으로 죽자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조문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1)의 무덤 곁에 장사 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司稼卿)에 제수하였다. 왕문도가 바다를 건너와 죽자 유인궤(劉仁軌)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國本有五部 三十七郡 二百城 七十六萬戶 至是 析置熊津馬韓東明金漣德安五都督府 各統州縣 擢渠長 爲都督刺史縣令以理之 命郞將劉仁願守都城 又以左衛郞將王文度爲熊津都督 撫其餘衆 定方以所俘見上 責而宥之 王病死 贈金紫光祿大夫衛尉卿 許舊臣赴臨 詔葬孫皓陳叔寶墓側 幷爲竪碑 授隆司稼卿 文度濟海卒 以劉仁軌代之

무왕(武王)의 조카 복신(福信)은 일찍이 병사를 거느리고, 승려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볼모로 가 있던 부여풍(扶餘豊)을 맞아서 왕으로 세웠다. 서북부 지역에서 모두 호응하니 병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포위하였다.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劉仁軌)를 검교대방주자사(檢校帶方州刺史)로 삼아서 왕문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신라 병사를 징발해 지름길로 보내 유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인궤가 기뻐하며 말하였다.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는 당나라 책력과 묘휘(廟諱, 죽은 황제의 이름)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말하였다.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正朔, 책력)을 해외에 반포하고자 한다.”

유인궤가 병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막았다. 유인궤가 신라 병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병사들이 후퇴하여 목책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강물이 가로막고 다리가 비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武王從子福信 嘗將兵 乃與浮屠道琛 據周留城叛 迎古王子扶餘豊 嘗質於倭國者 立之爲王 西北部皆應 引兵圍仁願於都城 詔起劉仁軌檢校帶方州刺史 將王文度之衆 便道發新羅兵 以救仁願 仁軌喜曰 天將富貴此翁矣 請唐曆及廟諱而行 曰 吾欲掃平東夷 頒大唐正朔於海表 仁軌御軍嚴整 轉鬪而前 福信等 立兩柵於熊津江口 以拒之 仁軌與新羅兵合擊之 我軍退走入柵 阻水橋狹 墮溺及戰死者萬餘人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나와 임존성(任存城)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병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병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때가 당나라 용삭(龍朔) 원년(서기 661) 3월이었다. 이때에 도침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 일컫고,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일컬으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하였다.

“듣건대 당나라는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들 중 노인과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이고, 그런 후에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스스로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유인궤는 편지를 써서 재앙과 복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유인궤의 사신을 바깥 숙소에 두고 거만하게 그에게 말하였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말할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보냈다. 유인궤는 병사가 적었으므로 유인원의 군대와 합쳐서 병졸들을 휴식시키고, 표문을 올려 신라와 힘을 합치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흠(金欽)에게 병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흠이 고사(古泗)에 이르자 복신이 요격을 해서 패배하였다. 김흠이 갈령도(葛嶺道)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병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대를 합쳤는데, 풍은 그를 통제하지 못하고 단지 제사만 주관할 뿐이었다. 복신 등은 유인원 등이 성에 고립되어 있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짐짓 위로하면서 말하였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福信等乃釋都城之圍 退保任存城 新羅人以粮盡引還 時 龍朔元年三月也 於是 道琛自稱領軍將軍 福信自稱霜岑將軍 招集徒衆 其勢益張 使告仁軌曰 聞大唐與新羅約誓 百濟無問老少 一切殺之 然後 以國付新羅 與其受死 豈若戰亡 所以聚結 自固守耳 仁軌作書 具陳禍福 遣使諭之 道琛等 恃衆驕倨 置仁軌之使於外館 嫚報曰 使人官小 我是一國大將 不合參 不答書 徒遣之 仁軌以衆小 與仁願合軍 休息士卒 上表 請合新羅圖之 羅王春秋奉詔 遣其將金欽 將兵救仁軌等 至古泗 福信邀擊 敗之 欽自葛嶺道遁還 新羅不敢復出 尋而福信殺道琛 幷其衆 豊不能制 但主祭而已 福信等 以仁願等孤城無援 遣使慰之曰 大使等 何時西還 當遣相送

16. 서기 662년(신라 문무왕 2년, 당 고종 용삭 2년)

당 용삭 2년(서기 662) 7월, 유인원과 유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병사를 크게 깨뜨리고 지라성(支羅城) 및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병사들을 나누어 그곳을 계속하여 지키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眞峴城)이 강을 끼고 있으며 높고 험준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병사를 보태어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유인궤가 밤에 신라 병사를 독려하여 성곽에 가까이 접근해 날이 밝을 무렵에 성 안으로 들어가 8백 명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통하게 되었다. 유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淄)ㆍ청(靑)ㆍ내(萊)ㆍ해(海)의 병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장군(左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를 보내 병사를 통솔해 바다를 건너 인원의 병사를 도와주게 하였다.

二年七月 仁願仁軌等 大破福信餘衆於熊津之東 拔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等柵 殺獲甚衆 仍令分兵以鎭守之 福信等 以眞峴城臨江高嶮 當衝要 加兵守之 仁軌夜督新羅兵 薄城板堞 比明而入城 斬殺八百人 遂通新羅饟道 仁願奏請益兵 詔發淄靑萊海之兵七千人 遣左威衛將軍孫仁師 統衆浮海 以益仁願之衆

이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굴 속에 누워 부여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부여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였다. 부여풍이 고구려와 왜국에 사신을 보내 병사를 요청하여 당나라 병사를 막았다. 손인사가 도중에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무리와 합세하니 병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였다. 어떤 자가 말하였다.
“가림성(加林城)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이곳을 쳐야 합니다.”
유인궤가 말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병사들이 다칠 것이요, 밖에서 지키면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소굴로써 무리들이 이곳에 모여 있으니, 만약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손인사와 유인원과 신라왕 김법민(金法敏)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인궤와 별수(別帥) 두상(杜爽)과 부여융(扶餘隆)은 수군과 군량을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병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덮고 바닷물도 붉게 되었다.

왕 부여풍은 몸을 피해 도주하였는데,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였다. 당나라 병사가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인과 더불어 항복하였는데, 오직 지수신(遲受信)만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時 福信旣專權 與扶餘豊 寖相猜忌 福信稱疾 臥於窟室 欲俟豊問疾 執殺之 豊知之 帥親信 掩殺福信 遣使高句麗倭國 乞師以拒唐兵 孫仁師中路迎擊破之 遂與仁願之衆相合 士氣大振 於是 諸將議所向 或曰 加林城水陸之衝 合先擊之 仁軌曰 兵法 避實擊虛加林嶮而固 攻則傷士 守則曠日 周留城 百濟巢穴 群聚焉 若克之 諸城自下 於是 仁師仁願及羅王金法敏 帥陸軍進 劉仁軌及別帥杜爽扶餘隆 帥水軍及粮船 自熊津江往白江 以會陸軍 同趍周留城 遇倭人白江口 四戰皆克 焚其舟四百艘 煙炎灼天 海水爲丹 王扶餘豊脫身而走 不知所在 或云奔高句麗 獲其寶劒 王子扶餘忠勝忠志等 帥其衆 與倭人並降 獨遲受信據任存城 未下

처음에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정방이 병사를 보내 이들을 공격했으나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였다. 상지가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소정방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 흑치상지는 별부장(別部將) 사타상여(沙吒相如)와 함께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때에 와서 모두 항복하였다.

유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며, 그들에게 임존성을 빼앗아 스스로 공을 세워 보이라고 하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손인사가 말하였다.
“야심이 있는 자는 믿기 어렵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무기와 곡식을 제공한다면 도적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인궤가 말하였다.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성심과 꾀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오히려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려두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손인사 등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갔다.

初 嘯聚亡散 旬日間 歸附者三萬餘人 定方遣兵攻之 常之拒戰敗之 復取二百餘城 定方不能克 常之與別部將沙吒相如據嶮 以應福信 至是皆降 仁軌以赤心示之 俾取任存自效 卽給鎧仗粮糒 仁師曰 野心難信 若受甲濟粟 資寇便也 仁軌曰 吾觀相如常之 忠而謀 因機立功 尙何疑 二人訖取其城 遲受信委妻子 奔高句麗 餘黨悉平 仁師等振旅還

당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하여금 백제 땅에 주둔하며 병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파괴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유인궤가 비로소 해골을 묻게 하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세우고 제방을 수리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업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보살피게 하였다.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正朔)과 묘휘(廟諱)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며 각기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황제가 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백제의 유민을 불러 모으게 하였다.

詔留仁軌 統兵鎭守 兵火之餘 比屋凋殘 殭屍如莽 仁軌始命 瘞骸骨 籍戶口 理村聚 署官長 通道塗 立橋梁 補堤堰 復坡塘 課農桑 賑貧乏 養孤老 立唐社稷 頒正朔及廟諱 民皆悅 各安其所 帝以扶餘隆爲熊津都督 俾歸國 平新羅古憾 招還遺人

17. 서기 665년(신라 문무왕 5년, 당 고종 인덕 2년)

인덕(麟德) 2년(서기 665) 부여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유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어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본기』에 실려 있다.

유인원 등이 귀국하자 부여융은 병사가 흩어질까 두려워하여 그 또한 당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儀鳳) 년간(서기 676~8)에 부여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熊津都督帶方郡王)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게 하고, 곧이어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겨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신라가 강성해져서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죽었다.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다시 그의 손자 경(敬)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ㆍ발해ㆍ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끊어졌다.

麟德二年 與新羅王會熊津城 刑白馬以盟 仁軌爲盟辭 乃作金書鐵契 藏新羅廟中 盟辭見 新羅紀中 仁願等還 隆畏衆携散 亦歸京師 儀鳳中 以隆爲熊津都督帶方郡王 遣歸國 安輯餘衆 仍移安東都護府於新城 以統之 時 新羅强 隆不敢入舊國 寄理高句麗死 武后又以其孫敬襲王 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 國系遂絶

18. 사관이 논평한다.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다.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이를 없애지 못하였다. 그런데 또한 들으니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小昊) 김천씨(金天氏)2)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이는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짓고 요극일(姚克一)이 글씨를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고구려는 역시 고신씨(高辛氏)3)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晋書)』의 기록에 보인다.] 고사(古史)에 이르기를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어찌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그들이 나라를 향유한 것이 그 얼마나 오래였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범하여, 유리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나라와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나라의 황제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도록 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論曰 新羅古事云 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 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博士薛因宣撰金庾信碑 及朴居勿撰姚克一書三郞寺碑文] 高句麗亦以高辛氏之後 姓高氏[見晋書載記] 古史曰 百濟與高句麗 同出扶餘 又云 秦漢亂離之時 中國人多竄海東 則三國祖先 豈其古聖人之苗裔耶 何其享國之長也 至於百濟之季 所行多非道 又世仇新羅 與高句麗連和 以侵軼之 因利乘便 割取新羅重城巨鎭 不已 非所謂親仁善鄰 國之寶也 於是 唐天子再下詔 平其怨 陽從而陰違之 以獲罪於大國 其亡也亦宜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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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권. 한국인문고전연구소에서 《삼국사기》를 우리글로 번역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점은 누구든 쉽게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다. 쉬운 낱말과 어색하지 않은 현대적인 문장으로 풀이하여,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독자들이 '옛 것'을 익히고, 나아가 '새로운 것'까지 알게 될 수 있도록 안내한다. 자세히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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