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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5>老兵이 걸어온 길-115-포병장교 무더기 진급

입력 2008. 11. 27   00:00
업데이트 2013. 01. 05   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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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년 3월에는 한꺼번에 포병장교 16명을 장성으로 진급시킨 일이 있었다.

    초창기 육군 역사에 그렇게 많은 장군이 동시에 태어난 것도 진기한 일이지만, 그들이 모두 포병이어서 대단한 화제가 됐다.

    내가 참모총장으로 부임한 1952년 가을이었다. 하루는 행정참모부장 신응균 소장(중장 예편·서독대사 지냄)이 총장실에 찾아와 포병 증강계획 방안을 보고하겠다고 했다. ‘포병지휘관 양성방안’이라는 것이었다. 신태영 국방부장관의 장남인 신 장군은 포병감 출신의 정예 포병장교였다.

    1953년 16명 장성 진급

    보고를 들어 보니 좋은 생각이었다. 보병 부사단장급 대령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뽑아 잘 교육시켜 포병으로 전과시키자는 계획이었다.일선 지휘관 시절 빈약한 포병 때문에 골머리를 앓아온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어서 흔쾌히 재가했다. 포병장교도 양성하고 보병장교 인사적체도 해결할 일거양득의 방안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포병증강 계획에 따라 17개 포병대대 증강이 예정된 때여서 포병 지휘관이 모자라는 형편이었다.당시 육군 각 사단에는 포병부대가 1개 대대씩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단 포병지휘관 계급이 모두 중령이었다. 보병과 포병 협동작전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던 사단장들은 계급이 낮은 포병지휘관들에게 ‘여기 와서 쏴라’ ‘저기 가서 쏴라’ 하는 식으로 지휘를 했다.

    정해진 포진지에서 원거리 근거리 표적을 전방위로 사격할 수 있는 포병의 특수성을 몰라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어떤 포병지휘관은 포진지에서도 쏠 수 있다고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가 사단장에게 구타당하는 일도 있었다.신 장군이 입안한 포병지휘관 양성방안은 선발된 우수 보병장교들에게 9주간 집중교육을 시키는 내용이었다.

    보포(步砲) 협동작전을 원활하게 하려면 보병지휘관과 포병지휘관의 계급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옳은 말이었다. 당시 미군은 사단장(소장) 아래 부사단장과 포병사령관이 같은 계급(준장)이어서 보포 협동작전이 잘 수행되고 있었다.

    16명의 대령을 포함해 중령급까지 30명을 선발, 광주 포병학교에 입교시킨 것은 1952년 10월이었다. 그들이 9주 교육을 수료한 1953년 1월, 나는 미 제5포병단 메이요 장군에게 부탁해 현장 실습교육까지 시켰다.

    미8군사령관 반대에 부딪혀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데서 터졌다. 미8군과 협의단계에서 테일러 미8군사령관에 의해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1953년 2월 말로 기억된다. 테일러 사령관에게서 “급히 좀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백 장군, 포병지휘관 장성진급 계획을 백지화해 줘야 하겠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서울 미8군사령부에 당도해 보니 그 일이었다.

    포병 출신인 테일러 장군은 포병이란 그렇게 단기간에 양성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포병은 평생을 두고 배워도 못 다 배운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은 옳은 말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고급장교들의 실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내심 불쾌했다. 그렇다고 내색 할수는 없었다.

    뒤에 들은 얘기지만 미8군이 브레이크를 걸고 나온 배경에는 한국군 포병장교들의 작용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군 포병장교들이 데이(Day) 미8군 포병부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진급 기회가 줄어들게 됐으니 다수의 보병장교가 포병으로 넘어오는 것을 환영할 리가 있었겠는가.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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